이라크 의회가 5일(현지시간) 긴급회의를 열어 이라크 주둔 미군 철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측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표결을 강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 군부 실세 가셈 솔레이마니와 친(親)이란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 핵심요인이 미국에 의해 폭살된 것에 대한 반발 조치다. 이라크 내부의 반(反) 미국 정서가 거세지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라크 의회의 미군 철수 결의안은 수니파와 쿠르드족 계열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시아파 출신 의원들의 압도적인 찬성 속에 가결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초강수에 이라크 내부 친이란 세력이 결집하는 모양새다. 결의안에는 “정부는 모든 외국 군대의 이라크 영토 주둔을 끝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외국 군대가 어떤 이유든 우리의 영토·영공·영해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라크 의회의 결의는 구속력이 없어 정부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나 의원내각제 국가인 이라크의 특성상 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 온라인매체 악시오스는 두 명의 트럼프 행정부 관료와 이라크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미국 관료들이 이라크 의회가 미군 철수 결의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도록 이라크 정부 고위관계자들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고 전했다. 미국에 대한 분노가 친이란 세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미군이 이라크 영토 안에서 이라크 정부의 허가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군사 작전을 감행한 것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 이라크 외교부는 미국의 바그다드 공항 공격은 주권 침해에 해당한다며 이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하기도 했다. 로이터통신은 “솔레이마니에 반대하는 이라크인마저 미국이 이라크 영토 내에서 두 요인을 살해함으로써 이라크를 더 큰 군사충돌에 휘말리게 만들었다고 분노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정부가 이라크 의회의 철수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미군 주둔에 대한 여론 자체가 악화되는 것은 중동에서 미국의 전략적 입지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당장 이슬람국가(IS) 잔존 세력이나 이란에 대한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 차원에서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중동 지역에서의 미국의 전략적 영향력이 흔들리는 것이다. IS 격퇴를 위해 결성된 국제동맹군은 이날 성명을 내고 IS 잔당 소탕을 위한 작전을 일시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라크 내부 동맹군 병력과 기지 보호에 주력하기 위해서다. 확산되는 반미 정서 탓에 미국 주도의 동맹군 부대를 겨냥한 공격이 벌어질 것을 우려한 조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라크 의회의 미군 철수 요구에 대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수준의 제재를 이라크에 가할 것이다. 이란 제재는 약하게 보일 정도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내가 취임하기 전 수십억 달러를 들여 지은 값비싼 우리의 공군기지가 이라크에 있다”며 “이라크가 그 비용을 물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가 동맹 관계인 이라크에도 제재를 경고했다”고 전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