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군부 최고 실세 가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미군의 공습으로 숨진 사건의 불똥이 미국도 이란도 아닌 이라크로 튈 것이라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수년간 미국과 이란 사이 공방의 중심지였던 이라크가 또다시 두 강국 가운데 끼어 ‘대리 전쟁터’로 전락하고 있는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갑작스런 극약 처방이 중동을 화약고로 몰아넣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솔레이마니 사망 이튿날인 4일(현지시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시내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렸다. 이들은 솔레이마니를 추모하며 눈물을 흘리고 복수를 다짐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도 울려 퍼졌다. 이란 최정예 군사조직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에서 해외작전 담당 특수부대인 쿠드스군을 이끌었던 사령관의 죽음에 이라크인들이 분개한 것이다. 솔레이마니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에 이어 이란의 2인자로 평가받는다.
같은 날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바그다드 북부 알발라드 공군기지와 미 대사관이 있는 그린존에는 포탄이 떨어졌다. 두 포격으로 이라크 군인과 민간인들이 부상을 입었다.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이란의 사주를 받은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가 유력한 공격 배후로 지목받고 있다. 이라크는 이란의 영향력 하에 있는 국가로 레바논, 시리아 등과 함께 중동 초승달 벨트(시아파 벨트)로 묶인다. 이라크 집권층에는 다수의 친(親) 이란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으며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민병대가 이라크 내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라크 내부에서 이번 사태에 분개하며 대(對) 미국 결사항전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은 친 이란 성향의 시아파 민병대들이다. 이들 중 하나인 카타이브-헤즈볼라는 레바논 알마야딘 방송을 통해 이라크 내부 미군 기지에 대한 공격을 예고하며 “이라크 군경 형제들은 5일 오후 5시부터 미군 기지에서 적어도 1㎞ 이상 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솔레이마니 살해 사건이 당사국들인 미국과 이란 간 전면전으로 이어지기보다 이란의 사주를 받은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와 미국의 대리전으로 비화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이라크 정국을 뒤흔들었던 반정부시위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이란의 내정간섭에 대한 분노였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판단력 결여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반 이란 목소리가 거세지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극약 처방이 이라크 내부 반미 세력의 결집만 이끌어냈다는 비판이다.
미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FP)는 ‘트럼프가 중동에 불을 질렀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향후 중동 정세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강경책으로 이란의 기를 누를 수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판단은 중동을 통제 불능 상태로 몰아넣는 성급한 오판이며, 이란이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해도 중동 내부에 다수 포진하고 있는 이란의 대리인들이 테러를 자행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FP는 구체적으로 시리아 동부 유전지대를 보호하는 미군들을 겨냥한 공습,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무역선에 대한 파괴,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 등 친미 산유국 에너지 시설에 대한 드론 공격 등이 일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란과 가까운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나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들이 솔레이마니 암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놨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