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란 군부 실세인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혁명수비대(IRGC) 정예부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공습·살해하면서 미-이란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이란은 ‘혹독한 복수’를 예고했고 미국은 ‘보복 시 52곳 공격’으로 맞불을 놨다. 세계 각국에서는 양측에 자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주도한 주요 6개국 ‘P5+1’(미국·중국·러시아·프랑스·영국+독일) 가운데 미국을 뺀 다섯 국가들이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들어선 뒤 JCPOA를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이란과 갈등을 빚었다.
우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적극 나섰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JCPOA 탈퇴 이후 미-이란 중재자를 자처해왔다. 로이터통신은 4일(현지시간) 마크롱 대통령이 바르함 살리 이라크 대통령과 중동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통화했다고 전했다. 프랑스 엘리제궁은 “양국 정상이 긴장 고조를 피하고, 이라크와 주변 지역의 안정보장을 위해 협력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UAE 실권자 셰이크 무함마드 빈 자예드 알나흐얀 아부다비 왕세제와도 중동 사태를 논의했고, 미국 공습 당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해 우려를 표명했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프랑스의 요청으로 이뤄진 통화에서 두 정상이 미국의 솔레이마니 사령관 공습은 중동 정세를 심각하게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고 전했다.
프랑스·독일·중국 외교장관들도 이날 통화를 나눠 중동 긴장 완화에 뜻을 모았다. 장 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중동 안정 및 이라크 주권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이란에는 핵합의 준수를 거듭 촉구했다.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빌트 일요판과 인터뷰에서 “상황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며칠 안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유엔과 유럽연합(EU)에서 하려 한다”며 “이란을 비롯한 중동 지역의 우리 파트너들과도 대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독일 국방장관은 성명에서 “미국이 독단적으로 행동했지만 솔레이마니도 테러·폭력으로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며 긴장 완화를 위해 이란의 자제를 촉구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 비판에 무게를 뒀다. 중국 외교부는 5일 왕 부장이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과의 통화에서 “중국은 국제 관계에서 무력 사용을 반대한다”며 “미군의 위험한 작전은 국제관계의 기본 규범을 위반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왕 부장은 전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도 통화해 “국제관계에서 무력 남용을 반대하고, 군사 모험주의는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보다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러시아는 중국과 같은 입장이라며 미국의 행동은 불법이고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의 통화에서도 미국의 공습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유엔 회권국이 다른 회원국의 공인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의도적인 행동들, 특히 제3국가에서 사전 통보도 없이 벌인 일은 노골적으로 국제법을 어긴 것”이라며 “미국이 자국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불법적·강압적 전략을 포기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영국은 양측에 자제를 촉구하면서도 미국을 일부 옹호했다. 벤 윌리스 영국 국방장관은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과의 통화에서 “모든 당사국이 (중동의) 긴장 완화에 나서줄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국제법상 미국은 자국민에게 임박한 위협을 가하는 세력에 대해 스스로 방어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영국 총리실은 보리스 존슨 총리가 미·영·프·독 정상들과 이번 사태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