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정책의 선진국, 영국의 놀이 공간을 들여다보기 위해 지난해 11월 런던을 찾았다. 영국은 2008년 국가놀이전략을 수립한 후 아이들에게 평등한 놀이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해왔다.
본 지는 ‘애비 오차드 커뮤니티 가든’ ‘텀블링 베이&팀버로지 놀이터’ ‘다이애나 메모리얼 놀이터’ ‘킬번 모험놀이터’ ‘홀랜드 파크 모험놀이터’ ‘바너드 모험놀이터’ ‘바터시 놀이터’ 등 10여 곳을 방문했다. 그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고, 개성이 강한 3곳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곳 가운데는 2008년 이전에 만들어진 공간이 일부 포함된다.
무엇보다 기사를 읽는 내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과 13년 전만 해도 영국은 세계 선진국 중 아동복지 분야 점수가 최하위로 낙제점이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아이들은 한국 아이들만큼이나 덜 걷고 실외놀이를 할 기회가 적었으며 어른들로부터 통제된 삶을 살고 있었다.
다이애나를 사랑한 국민, 다이애나가 사랑한 아이들
종종 영화에선, 퇴역한 정보부 요원이 짧은 운동복 차림으로 조깅을 하는데 누군가 예고없이 나타나 사건을 의뢰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개, 복잡한 사건이 생겼고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그밖에 없으니 한 번만 도와달라는 얘기를 나누며 영화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의 시선을 이 두 사람이 앉아있는 배경, 공원으로 옮겨보자. 잘 정비된 녹지 사이 벤치가 있고, 저 멀리 인공호수가 눈에 띈다. 하얀 새들 사이로 유모차를 끌고 가는 젊은 부부의 평화로운 모습도 보인다.
오늘의 이야기는 공원에서 출발한다. 런던에는 이 같은 왕립공원이 모두 8곳 있다. 오래전 왕족들이 사냥 등 여가에 사용하다 공공에 개방했다. 이런 공원은 각종 건물로 빽빽하게 들어찬 런던의 복잡한 도심에 숨통을 틔여준다. 그중 하나가 켄싱턴 가든(Kensington Gardens, 107만㎡)이다. ‘다이애나 메모리얼 플레이그라운드(The Diana Princess Of Wales Memorial Playground)’는 바로 이 켄싱턴 가든의 서쪽 끝자락에 있다.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2000년 6월 왕립공원관리기구(The Royal Parks)는 다이애나의 어린이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기려 놀이터를 조성했다. 이들에 따르면 매년 100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 하루 2700여명 꼴이다. 공원 관리자가 집계한 이 수가 신뢰가 가는 것은 이곳은 유료 놀이공원처럼 상주 직원이 들어오는 사람을 체크하기 때문이다. 입장은 무료이지만 입장 시간이 계절별로 제한되고, 어린이를 동반한 어른, 어른을 동반한 어린이만 입장 가능하다.
“여기선 내가 피터 팬? 아니 후크선장이다!”
다이애나를 추모한다는 슬픈 배경과 달리, 놀이터는 동화 속 캐릭터 ‘피터 팬(Peter Pan)’을 모티브로 설계했다. 놀이터에 들어서면 아이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실제 크기의 해적선. 후크 선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아찔한 상상이 아이들의 가슴을 출렁이게 한다. 모래사장 위 해적선은 풍랑을 만나 좌초한 배를 아이들이 스스로 발견한 것 같은 기쁨도 준다. 주변을 걷다 커다란 보물상자를 발견하고,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필 수 있다. 원뿔 모양의 텐트와 무서운 표정의 장승들이 서 있는 인디언 마을, 운동하며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신통방통 기구들까지. 놀이터는 판타지가 가득한 피터 팬의 이야기 요소를 곳곳에 심어놨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크고 작은 식물들로 분리된 공간을 미로를 헤매듯 탐험한다. 나무 울타리 구멍을 지나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하고, 아름드리나무에 조각된 무서운 할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하노라면 집에서 읽던 평면 동화책이 오늘 밤 아이들의 꿈으로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영국 왕립공원관리기구가 하필 피터 팬을 놀이터의 콘셉트로 결정한 것은, 피터 팬을 탄생시킨 작가 제임스 메튜 베리(1860~1937)가 실제 켄싱턴 가든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피터 팬 이야기의 탄생 실화를 다룬 영화 ‘네버랜드를 찾아서’(마크 포스터 감독, 2004)를 보면, 연극 흥행 실패 후 실의에 빠진 제임스 메튜 배리(조니 뎁)는 기분 전환을 위해 켄싱턴 가든에 산책을 나왔다가 남편을 잃은 한 여인(케이트 윈슬렛)과 그녀의 네 아들을 만난다. 아이가 없던 제임스는 사내아이들의 활달함에 마음을 빼앗기고,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마술을 하고 해적 놀이를 하며 동심의 나날을 보내는데, 그 중 유난히도 섬세한 영혼을 가진 피터에게서 영감을 얻어 그의 이름을 딴 ‘피터 팬’ 이야기를 완성하게 된다.
실제 피터 팬은 제임스 배리가 런던 켄싱턴 가든에서 만난 실비아 르웰린 데이비스라는 여인의 아이들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피터 팬은 1902년 소설 ‘작은 하얀 새’의 일부로 담겼다가, 1904년 크리스마스 아동극 ‘피터 팬: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으로 상연돼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후 1906년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이란 제목의 소설로 출판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1911년, 동화 ‘피터와 웬디’가 출간된다.
다이애나 메모리얼 플레이 그라운드의 시사점
다이애나 메모리얼 플레이 그라운드는 놀이터를 만들 때 어떤 콘센트를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어른들에게 하나의 선택지를 알려준다. 낯익은 동화나 소설 속 요소를 놀이 공간에 구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이다. 더불어, 지역과 연관된 실제 사건이나 이미지를 놀이터에 재현함으로써 아이들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애정이 담긴 도심 공간으로 사랑받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왕립공원 관리기구는 다이애나 메모리얼 플레이 그라운드를 만들면서 120만 파운드(한화 20억원)를 들였다. 하나의 놀이터를 짓는 비용으로써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잘 만들어진 놀이 공간이 지역 어린이와 주민들에게 주는 여러 긍정적 요소를 고려하면 지자체가 욕심내 투자해 볼 이유 역시 적지 않다. 제주에서는 조합 놀이대와 고무매트로 구성된 똑같은 놀이터를 만드는 데에만도 놀이터당 적어도 2억원 내외의 비용이 들어가고 있다. 공간이 훨씬 좁은 데도 말이다.
다큐멘터리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이처럼 지역성과 아이들의 욕구를 잘 반영해 만들어진 다이애나 놀이터에 대해 “탐사가 가능하고, 상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공간”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런던(영국)=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