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를 방불케 했던 ‘악기케이스’ 탈출극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카를로스 곤(65)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이 지난달 말 도쿄 자택에서 외출하는 모습이 감시카메라에 포착됐다는 일본 수사 관계자의 발언이 나왔다. 만약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일본 언론 등의 악기케이스 탈출 보도는 사실이 아닌 게 된다.
일본 NHK는 곤 전 회장이 지난달 29일 낮 도쿄도(東京都) 미나토(港)구에 있는 자택에서 혼자 외출하는 모습이 자택 현관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에 촬영됐고, 이후 귀가하는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일본 수사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3일 보도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곤 전 회장이 그날 외출한 이후 다른 장소에서 누군가와 합류해 공항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주변 방범카메라 영상을 분석하는 등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가택연금 상태였던 곤 전 회장이 혼자 자택에서 걸어 나왔다면 악기케이스에 숨어 자택에서 탈출했다는 기존 일본 언론 등의 보도는 사실이 아닌 게 된다.
앞서 교도통신은 곤 전 회장이 지난달 자택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된 악단이 가지고 왔던 악기케이스에 들어가 감시카메라를 피해 나왔다고 전했다. 이후 대기하고 있던 트럭으로 공항까지 이동했다고 곤 전 회장의 지인을 인용해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곤 전 회장은 미국의 대리인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내 아내 캐럴과 다른 가족이 나의 일본 출국에서 역할을 했다는 언론 보도는 거짓”이라며 “나는 혼자 출국을 준비했다. 가족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외신 보도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또 “나는 유죄를 전제로 취급받았다. 나는 더 이상 차별이 만연하고 기본적인 인권이 무시되는 부정(不正)한 일본 사법 제도의 인질이 아니다”라며 “나는 불공정과 정치적 박해로부터 도망쳤다. 겨우 미디어와 자유롭게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됐다”고 일본의 사법체계를 비판했다.
르노·닛산·미쓰비시자동차 3사 연합체를 이끌던 곤 전 회장은 2011~2015년 유가증권 보고서에 5년간의 소득 50억엔(약 500억원)을 축소 신고한 혐의(금융상품거래법 위반)로 2018년 11월 구속됐다. 이후 지난해 3월 10억엔(약 106억원)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하지만 한 달여 만에 재구속된 뒤 추가 보석 청구 끝에 5억엔(약 53억원)의 보석금을 내고 지난해 4월 풀려나 출국금지 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포 이후 모든 직위에서 쫓겨난 곤 전 회장은 르노와 닛산차의 경영통합 계획에 반발하는 닛산차 일본인 경영진이 자신을 몰아내기 위해 검찰을 앞세워 내부 쿠데타를 일으킨 게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고 주장해왔다.
아울러 곤 전 회장이 비판했듯 일본의 형사사법체계는 후진적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인질사법(人質司法)’으로 대표되는 일본 사법체계는 용의자를 유죄로 간주해 구속수사가 기본이다. 손쉬운 구속 탓에 압박 심문으로 ‘허위 자백’을 유도하고 구속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새로운 혐의를 추가하는 ‘인질사법’이 만연한 것이다. 이런 수사 방식으로 일본 검찰의 1심 유죄율은 99%에 달한다.
이 때문에 곤 전 회장의 수사와 관련해 해외 언론도 여러 차례 문제를 제기했다. 프랑스와 미국 언론은 곤 전 회장이 ‘이상한 종교재판’으로 몰리고 있다며 일본 검찰의 편법적 수사 행태를 비판했다. 국제사회의 여론을 인식한 탓인지 도쿄지방법원도 곤 전 회장에게 두 차례나 보석 결정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일본 언론은 현행 피고인 보석 제도를 지적하며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일본의 주권을 뒤흔든 곤 피고의 도망’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보석 중인 피고의 도주는 이 외에도 잇따르고 있다”며 “보석제도의 기본 방향과 운용에 대한 논의를 서두르고 싶다”고 지적했다. 산케이(産經)신문은 ‘곤 피고의 보석을 인정한 것이 잘못이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도주 가능성이 있었던 곤 전 회장에 대한 법원의 보석 결정을 비판했다.
한편 일본 수사당국은 보석 조건을 위반하고 외국으로 도피한 곤 전 회장에 대해 국제형사경찰기구(ICPO·인터폴)에 국제수배를 요청했다. 알베르트 세르한 레바논 법무장관은 2일(현지시간) 곤 전 회장에 대한 인터폴의 ‘적색수배’ 요청이 검찰에 접수됐다고 확인했으나 현재로선 레바논 정부가 곤 전 회장의 신병을 직접 일본에 넘길 가능성은 크지 않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