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중동정책이 최대 위기를 맞았다. 미군의 이라크 내 친이란 민병대 폭격에 반발한 시위대가 바그다드 미국대사관을 습격하고 전면 봉쇄하면서다.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관이 직접 공격에 노출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격의 배후를 이란으로 지목하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이란의 대(對)이라크 영향력을 억제하는 데 주력해온 미국의 정책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에 따르면 이라크 내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 카타이브-헤즈볼라를 폭격한 미국의 항의하는 시위대 수천 명은 지난달 31일 오전(현지시간) 바그다드 그린존 내 미국대사관을 공격했다. 시위대 중 일부는 5m 높이의 대사관 철문을 부수고 들어가 로비에 불을 지르는 등 내부 시설물을 파손했다. 대사관 경비초소는 불에 타고 감시 카메라도 파손됐다. 대사관 경비를 맡은 미 해병대는 최루탄과 섬광탄을 발사하며 대응했다.
미국대사관이 위치한 바그다드 그린존은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 외국 공관 등 중요 시설이 몰려있어 평소에도 삼엄한 경계가 이뤄지는 곳이다. 친이란 시위대가 손쉽게 그린존에 진입한 것을 미뤄 이라크 경비병력이 이들을 묵인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란이 이라크 정부 내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제기됐다.
시위대는 대사관 바깥에 텐트를 치고 농성하며 대사관을 봉쇄했다. 이들은 미국대사관을 폐쇄하고 외교관들이 이라크를 떠날 때까지 농성을 풀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다. 300명 안팎으로 추정되는 대사관 직원들은 건물 내 안전구역으로 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튜 튜얼러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는 피습 당시 해외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미군은 지난달 29일 이라크와 시리아 영토 내에 위치한 카타이브-헤즈볼라 기지 5곳을 공습해 25명을 숨지게 했다.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 소행으로 추정되는 로켓포 공격으로 미국 용역업체 직원 1명이 숨진 데 대한 보복성 공습이었다. 하지만 미군이 이라크 영토 내에서 군사작전을 벌인 것이 주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역풍이 불었다.
이라크에서는 최근까지 친이란 성향 현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져왔다. 이번 사건이 이라크 국민들의 반미 감정에 불을 붙인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대사관을 습격한 시위대는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구호로 쓰였던 “미국에 죽음을, 미국은 사탄”을 외쳤다. 일부 시위대는 시아파 민병대 군복을 입고 민병대 깃발을 대사관 철조망에 걸기도 했다.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이번 사건이 악화해 미국 외교관이 죽거나 다칠 경우 정치적 타격을 피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2012년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 피살 사건을 거론하며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관은 몇 시간째 안전한 상황”이라며 “벵가지 사태는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면서 “대사관 공격을 배후 조종한 건 이란”이라며 “전면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도 밝혔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대사관 습격 사태 대응을 위해 제82 공수사단 소속 병력 750명을 급파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