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탈주극.”
카를로스 곤 전(前)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이 31일(현지시간) 일본을 빠져나가 레바논에 있다고 밝히면서 탈주 과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반면 허술함 출입국 감시가 만천하에 알려진 일본은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한 가운데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곤 전 회장은 보수 축소 신고와 회사자금 유용 등 혐의로 재작년 11월 체포됐다. 이후 1차 보석 결정으로 석방됐다가 재체포를 거쳐 지난해 4월 2차 보석으로 풀려난 뒤 가택연금 상태였다. 출국이 아예 금지된 그는 소지하고 있던 레바논, 브라질, 프랑스 여권도 변호인에게 제출했다. 브라질의 레바논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레바논에서 자라고 프랑스에서 기업가로 성공한 그는 세 나라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
정상적인 경로로 해외로 나갈 수 없었던 그의 탈주 방법이 1일 레바논과 프랑스 언론을 통해 하나둘씩 알려지고 있다. 일본과 구미 언론이 레바논 언론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곤 전 회장 도주 작전은 아내인 캐럴의 주도 아래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됐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이용해 탈주를 시작했다.
도쿄 미나토구의 자택에 머물던 곤 전 회장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연주자들을 초청했다. 이때 악단을 가장한 민간경비업체 사람들이 CCTV 등 감시망을 피해 곤 전 회장을 대형 악기 상자에 숨겨 빠져나왔다. 곤 회장은 모처에서 수일간 숨어 있다가 29일 오후 11시 10분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에서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30일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터키 국적 항공사 소속의 소형 제트키를 타고 레바논으로 향했다. 그의 아내 캐럴은 이스탄불에서 남편과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캐럴은 월스트리트저널의 취재에 “남편과 다시 만난 것은 인생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일본 언론은 “자가용 비행기로 출국해도 일반 여객과 마차가지로 출국 수속을 밟아야 한다”면서 “곤 전 회장이 출국 당시 신분을 위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곤 전 회장은 터키에서 레바논으로 입국할 때 프랑스 여권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일본 출국 당시엔 외교관과 그 가족의 소지품에 대해 관세검사가 면제되는 것을 이용해 수하물 검사 없이 악기 상자에 숨어 개인 전용기에 실렸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프랑스 르몽드는 “곤 전 회장 측이 터키를 경유지로 선택한 배경에는 부인 캐롤의 이복 오빠가 터키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마이니치 신문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지만 곤 전 회장의 탈출 과정에 부인인 캐럴과 연락을 주고받은 레바논 민병대 헤즈볼라가 관여한 의혹이 있다”고 전했다.
한편 곤 전 회장의 재판을 관할하는 도쿄지방재판소(법원)는 검찰 측 청구에 따라 보석 조건을 위반한 곤 전 회장의 보석을 취소하고 2차례에 걸쳐 납부한 총 15억엔(약 150억원)의 보석보증금은 몰수했다.
일본 정부는 곤 전 회장의 신병 인도를 외교 루트를 통해 레바논 정부에 요청할 방침이다. 레바논과 일본 사이에는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은데다 레바논 정부는 곤 전 회장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곤 전 회장은 베이루트 도착 후에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을 면담했으며 현재 레바논 정부의 엄중 호위를 받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곤 전 회장의 탈주극을 전혀 몰랐다며 선을 그었다.
이에 따라 올 4월부터 본격 시작될 예정이던 곤 전 회장의 공판 진행은 어려워진 상황이다. 곤 전 회장은 앞서 성명에서 “유죄를 전제하고 차별이 만연하며 기본적인 인권이 무시되고 있는 부정한 일본 사법제도의 인질이 되고 있다”며 일본의 사법 체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곤 전 회장의 탈주극을 놓고 책임 공방이 시작됐다. 일본 검찰 간부는 산케이 신문에 “일본의 형사사법제도의 부끄러움을 전세계에 알린 법원과 변호인단은 책임이 무겁다”고 비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