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곤(65)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의 영화 같은 일본 탈출극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파티가 열려 사람이 많고 복잡한 틈을 타 연주자들이 가지고 왔던 악기 케이스에 숨어 CCTV 등의 감시망을 피해 일본을 떠나왔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던 탓에 일반적인 경로로는 출국이 불가능했던 그가 일본을 떠나오자 그의 탈출 경로에 관심이 집중됐다.
31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소식통들을 인용해 곤 전 회장을 일본 도쿄에서 빼내오기 위한 계획이 몇 주 전부터 준비됐으며 지난 주말에 계획이 실행됐다고 전했다. 곤 전 회장은 보수 축소 신고와 회사자금 유용 등 혐의로 재작년 11월 체포된 후 1차 보석 결정으로 석방됐다가 재체포를 거쳐 지난해 4월 다시 보석으로 풀려난 뒤 가택연금 상태였다.
그는 총 15억엔(약 160억원)의 보석 조건으로 3일 이상의 여행을 하는 경우 재판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출국은 아예 금지됐다. 아울러 곤 전 회장이 거주하고 있던 도쿄 미나토(港)구 자택의 현관에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있었고, 소지하고 있던 프랑스, 레바논 등의 모든 여권은 변호인에게 맡겼다. 브라질의 레바논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레바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프랑스에서 르노그룹 회장 자리까지 올랐던 곤 전 회장은 총 세 나라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
곤 전 회장은 일본 형법상 ‘징역·금고 3년 이상에 해당하는 죄로 기소된 피고인’에 해당해 출입국관리 당국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돼있다. 출국하고자 할 경우 입국심사관이 곧바로 수사기관에 통보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로로의 해외 출국은 불가능했다.
그런 곤 전 회장이 오는 4월 시작될 예정이던 공판을 앞두고 일본에서 사라진 뒤 30일 오후 11시30분쯤(현지시간) 어린 시절을 보냈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한국시간 기준 31일 오후 “나는 레바논에 있다”며 미국 대리인을 통해 일본의 사법체계에서 벗어났음을 선언했다.
일본 당국은 그의 출국 소식을 WSJ 등 해외 언론을 통해 처음 접한 뒤 부랴부랴 탈출 경로 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한지 하루가 지난 현재까지도 정확한 탈출 경로는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MTV, 르몽드 등 레바논과 프랑스 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을 종합해보면 곤 전 회장의 탈출은 오래전부터 아내 캐럴이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마이니치신문 등 일본 매체들이 현지 언론을 인용해 전한 내용에 따르면 전체 탈출 계획은 캐럴이 짰다. 캐럴은 터키 이스탄불 공항을 떠나 레바논 베이루트 공항에 도착한 자가용 비행기에도 곤 전 회장과 함께 타고 있었다고 한다.
곤 전 회장의 가장 유력한 탈출 경로로 꼽히는 것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이용해 악기 케이스 속에 숨어 탈출했다는 설이다. 며칠 전 곤 전 회장의 자택에서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렸는데, 악단을 가장한 민간경비업체 사람들이 돌아갈 때 커다란 악기 케이스에 곤 전 회장이 몸을 숨겨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CCTV 등 감시망을 피해 자택을 무사히 벗어난 그는 수도권의 나리타(成田), 하네다(羽田)공항을 택하지 않고 오사카(大阪)에 있는 간사이(關西)국제공항을 이용해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경유지인 터키 이스탄불로 날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다시 자가용 비행기로 갈아타 30일 새벽 레바논 베이루트 공항에 도착했다.
이와 관련해 산케이신문은 간사이공항 사무소 측이 지난달 29일 밤 자가용 비행기 한 대가 이스탄불로 떠난 사실은 확인해줬지만 탑승자 이름과 출발시간은 밝히지 않았다고 전했다. 일본 언론은 ‘자가용 비행기로 출국하는 경우도 똑같은 출국 수속을 밟아야 하지만 곤 전 회장의 출국 기록이 확인되지 않았다’며 신분을 위장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레바논 치안 당국자는 31일 NHK에 “(곤 전 회장이) 다른 이름으로 입국했다. 카를로스 곤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한편 곤 전 회장의 재판을 관할하는 도쿄지방재판소(법원)는 검찰 측 청구에 따라 보석 조건을 위반한 곤 전 회장의 보석을 취소하고 2차례에 걸쳐 납부한 총 15억엔의 보석보증금은 몰수하기로 했다. 또 일본 검찰은 외교 경로를 통해 레바논 정부에 곤 전 회장의 신병 인도를 요청할 계획이다. 다만 일본과 레바논은 범죄인인도조약을 맺고 있지 않아 성사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와 관련해 일본 언론은 일본 정부의 적군파 멤버 송환 요구를 레바논 정부가 거부한 적이 있다며 곤 전 회장의 신병 인도 요구에 응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레바논 당국은 곤 전 회장이 레바논에 합법적으로 들어왔다며 어떠한 법적 조치도 없을 것이라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현재 곤 전 회장은 베이루트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아내 캐럴과 함께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베이루트 도착 후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을 면담하고 레바논 정부로부터 엄중 호위를 받고 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