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마주칠 수 없지만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끌림이 있다. 눈빛으로 감정을 전달할 수 없지만 단단한 말투가 주는 울림이 있다. 앞을 못 보는 건 신체 일부에 손상을 입은 것일 뿐이라며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고, 먼저 다가가 세상에 말을 걸겠다는 진취적인 리더십이 있었다. 장애인 인권을 위해 10년 넘게 싸워 온 정아영 (33)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 대표를 17일 저녁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나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를 통한 여성 장애인 인권 보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스무살,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 대표는 스무살이 되던 해 대학에 입학하면서 차별을 알았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었다. 점자책은커녕 음성으로 전환해 들을 수 있는 시각장애인용 텍스트 파일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이런 고충을 토로하고 싶었는데 들어줄 창구가 없었다. 이듬해부터 뜻을 함께할 동료를 모으는 것으로 장애인권운동에 첫 발을 뗐다. 교내 학생을 중심으로 장애 유형을 나눈 뒤 고충을 청취하고 기록했다. 개선 요구사항을 정리해 학교에 제출했더니 점점 바뀌었다. 학교 안 장애인 편의시설이 생겼고, 장애인 취업 멘토 제도가 신설됐다. 당연한 건데도 괜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보장받아야할 권리를 인심 쓰듯 내주는 사회에 익숙해서였을까. 이때부터 정 대표의 삶의 방향이 정해졌다. 다부진 목소리에서 결기가 느껴졌다.
정 대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사는 사회를 꿈꾼다. 불가능하다고? 그는 가능한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겪어봐서 안다. 그는 통합 교육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진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친구들은 종종 “아영아 이것 좀 봐!”라고 말했다. 그가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까먹고는 했다. 젓가락질을 못하는 친구가 있다면 앞을 못 보는 친구도 있을 수 있다는 식이었다. 그만큼 자신들과 정 대표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지 않고 살았다. 장애인을 사람 자체로 대했던 그 시절 친구들은 지금도 소수의 ‘비정상인’과 다수의 ‘정상인’을 편가르지 않고 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공존하니 그게 가능했다. 눈에 있는 작은 손상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걸음들
“하하, 등급제는 없어졌어요. 전 그냥 ‘심한 장애인’이에요”
“아영씨는 시각장애 1급인 거죠?”라는 물정 모르는 질문에 정 대표가 웃으며 답했다. 심한 장애인?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해 7월 장애등급제가 폐지됐다. 기존 장애등급제도는 1~6등급으로 장애인을 구분했다. 현재는 장애정도를 기준으로 ‘장애가 정도가 심한 장애인(중증)’과 ‘장애가 정도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경증)’으로 단순화했다. 그렇게 따져보니 정 대표는 ‘심한 장애인’이 맞았다. 단어가 주는 무게감과는 별개로 그냥 그렇게 됐다. 6단계에서 2단계로 나눈 것을 폐지라고 할 수 있을까. 어찌됐든 장애에 등급을 매기고 있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장애인 개개인의 욕구와 환경을 고려하는 ‘장애인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표’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를 토대로 장애인 개개인에게 맞는 일상생활 영역 서비스, 주거, 소득과 고용 분야에 대한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장애등급제가 폐지되면서 장애인들은 종합조사표에 적힌 질문에 답을 하게 됐다. 이를 통해 ‘심한 장애인’과 ‘심하지 않은 장애인’으로 나뉘고, 결과에 따라 각종 혜택 및 지원을 받게 된다. 시각장애인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밥을 먹을 수 있나요?’ 였다.
“혼자서 밥을 먹을 수는 있죠. 하지만 반찬을 구별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이건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문항을 구성하고 그에 맞게 정도를 구분했어야 해요. 국가정책이 실현되기 위해 최소한 정책 당사자들의 동의는 받아야하는 것 아닌가요?”
정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장애등급제 폐지는 시혜의 관점에서 사회와 함께할 권리, 도움 받을 권리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고 개인별 특성과 욕구를 반영하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이 자체는 환영한다”면서도 “문제는 장애인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장애정도를 구분하는 기준과 그로 인한 효과 모두 문제가 많다”고 비판했다.
종합조사표는 장애인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혜택이 제대로 돌아갔을 리 없다. 정 대표는 지난 10월 10일 종합조사표에 시각장애인 특성을 반영해달라며 자체 문항을 개발해 정부에 제안했다. 일단은 시급한 몇 개만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보건복지부는 모든 장애인의 욕구를 충족해줄 수 없다고 답변했지만,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럴 이유가 없었다. 문제제기를 한 결과 ‘계약서 등 법적 책임이 따르는 문서 내용을 시각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직접 처리할 수 있나요?’ ‘긴급한 상황 판단 시 타인의 특징(인상착의 등)을 인식하여 고려할 수 있나요?’ 같은 문항이 신설됐다.
아직 갈 길은 멀다. ‘옷을 갈아입을 수 있나요?’가 아니라 ‘양말 오른 쪽과 왼쪽을 구분할 수 있나요?’가 돼야 한다. ‘목욕을 할 수 있나요?’가 아니라 ‘샴푸와 린스를 구별할 수 있나요?’로 바뀌어야 한다.
“개인의 환경이나 사회적인 상황 등 전반적인 현실을 고려해 장애정도를 다각도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해요. 국가는 이걸 개선하겠다고 해놓고 다시 두 단계로 나눠버렸어요. 놀랍게도 극과 극으로요. 이마저도 장애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기준이었고요.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심한 장애인인가요?’라는 질문을 듣습니다. 등급이 아니라 인간으로 대우받길 원합니다. 그래서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어요.”
이 말을 하는 정 대표의 목소리에 더 힘이 들어갔다.
학습권에서 배제된 장애인들
정 대표는 “시각장애인은 학습권에서 배제됐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어 직접 도서관에 텍스트 파일(기기에 연결하면 텍스트가 음성으로 전환된다)을 요구했다. 교재를 텍스트로 입력할 사람도 직접 구했다”며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 책을 읽으려면 힘들겠다’는 현실에 동의하면서도 실질적인 대책 마련에는 소극적이다. 적어도 학습 교재만큼은 텍스트 파일을 제공했으면 좋겠다”고 역설했다.
정 대표는 특히 여성 장애인의 학습권을 말했다. 장애 여성은 ‘장애’와 ‘여성’이라는 이중 차별에다가 빈곤 문제까지 추가된 삼중 차별을 받고 있다. 교육, 결혼, 취업, 사회참여 등 삶 전반에서 배제되고 있다. 교육은 취업으로, 경제 활동으로, 평등한 결혼생활로 이어질 수 있다.
장애 여성의 여러 문제는 교육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정 대표의 생각이다. 국민 모두는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받아야하고 특히 장애인은 이 권리에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장애계, 여전히 성차별 문제 심각
장애인 사회는 비장애인에 비해 아직은 성차별적인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인권운동에 한창이던 10년 전, 정 대표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장애인 성별별 교육 수준과 경제활동참가율, 소득 수준 등이 담긴 통계를 요청했다. 장애인구 42%를 차지하는 장애 여성은 모든 부분에서 열악했다. 남성 절반 수준이었다. 최근 그는 다시 한 번 같은 통계를 요청했는데 결과는 같았다. 바뀐 것이 없었다.
정 대표는 “10년째 안 바뀌는 통계다. 믿을 수 없을 정도”라며 “우리는 그때도 인권활동을 했었는데 여전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회는 장애 여성에게 세상에 맞추며 스스로 극복하라고 강요하고 있다”며 “우리도 자기결정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에서 장애 여성은 그냥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래도 희망을 본다. 현재 여성단체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여성의 지위가 미약하나마 나아졌고, 이 바람이 장애계에도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우리도 해보면 결국엔 되지 않겠어요?” 정 대표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배워서 알아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정 대표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곧 석사학위를 얻는다. 장애 여성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최근 값진 선물을 받았다. 사회복지법인 ‘따뜻한동행’은 지난달 ‘2019 첨단보조기구 지원사업’ 대상자 9명을 선정하면서 정 대표에게 점자단말기를 증정했다. 텍스트 파일을 기기에 연결하면 점자로 변경돼 송출된다. 정 대표는 이제 영어와 중국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다. 모든 시각장애인이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기를 그는 바란다.
“시각장애인이 편리한 세상이 다른 이에게 불편할 리 없어요. 장애인을 위한 경사로를 설치하기까지 여러 말이 오갔지만 지금은 누구나 이용하고 있잖아요. 없으면 만들고 필요한 사람이 이용하면 됩니다. 소수의 욕구를 ‘활용할 사람이 적다’는 이유로 배척하지 말고 여러 욕구 중 하나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아이폰에는 음성인식 기능이 탑재돼있어요. 모두가 사용하진 않겠지만 개발단계에서 이 기능을 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필요하지 않으면 놔두면 돼요. 누군가는 이 기능만 사용할 거고요. 시각 장애인을 위해 별도의 기술력을 들여 무언가를 개발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람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으로 이해하면 쉽지 않을까요?”
정 대표는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들’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시각장애인의 이야기를 글과 영상으로 알리면서 세상에 한발자국씩 다가겠다는 취지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한 말은 ‘공감’이었다. 그가 말을 걸어올 때, 세상이 부디 공감하기를 바란다. 말을 걸 준비가 된 사람들이 공감할 준비가 되지 않은 세상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