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을 둘러싼 러시아와 폴란드의 과거사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폴란드에 2차 대전 발발의 책임이 있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주장이 폴란드 사회를 격분케 하자 폴란드 총리가 직접 나서 4쪽짜리 비판 성명서를 발표했다. 급작스런 푸틴의 폴란드 공격 배경에는 ‘유라시아 제국’ 부활을 향한 러시아의 야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 가디언은 30일(현지시간) 2차 대전의 역사적 진실을 둘러싼 러시아와 폴란드의 갈등을 전했다. 보도에 다르면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전날 성명을 통해 “푸틴은 자신이 러시아에서 저지른 정치 실패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반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스탈린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와 공모하지 않고, 그에게 천연가스를 공급하지 않았다면 나치 독일 범죄 조직이 유럽을 점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폴란드 외무부도 “푸틴의 말들은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전체주의 정권 시절 선전 선동과 유사하다”고 맹비난했다.
모라비에츠키 총리의 공개 성명서는 푸틴 대통령이 지난 24일 러시아 국방부 회의에서 꺼낸 발언에 대한 맞대응이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자리에서 나치 독일의 지도자인 히틀러와 서방세계가 공모해 2차 대전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주장을 펴다 돌연 폴란드를 공격했다. 폴란드가 유럽 내 유대인들을 말살하려는 히틀러의 계획에 찬동한 반유대주의 국가라는 주장이었다. 그는 나치 독일 시절 주독 폴란드 대사를 지목해 “인간쓰레기, 반유대주의 돼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영 BBC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지난 주 주요 회의 석상에서 최소 다섯 번 이상 폴란드를 거론하며 트집을 잡았다.
현지 언론들은 푸틴의 난데없는 폴란드 비난의 배경에 지난 9월 유럽의회의 결의안에 대한 불만이 놓여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유럽의회는 당시 결의안에 소련(러시아의 전신)과 나치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맺고 협력하면서 2차 대전이 발발했다는 내용을 담았는데 이 내용이 푸틴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소련이 동맹국들과 나치 독일에 맞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아있다. 푸틴 등 러시아 집권세력은 확장주의적 외교정책의 명분도 여기서 찾고 있다. 소련 제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각하며 그 제국을 계승한 러시아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소련을 2차 대전의 가해자로 지목한 유럽의회 결의안에 러시아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소련 제국의 영화’를 되찾겠다며 자신들의 과두 독재체제에 대한 내부 불만을 억누르고 있는 러시아 집권세력의 입장에서 유럽의회의 결의안은 집권 정당성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푸틴은 지난해 3월 대선을 앞두고 가진 대국민 연설에서 “러시아 현대사를 바꿀 수 있다면 소련의 붕괴를 되돌리고 싶다”고 말했다. 러시아 국민들의 강대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발언이었다.
BBC는 유럽의회에 격노한 푸틴이 폴란드에 화풀이 하는 이유에 대해 전형적인 ‘푸틴식 말돌리기 수법’이라고 평가했다. 푸틴은 자신에게 비난이 쏟아지고 논리적 대응이 어려울 때 다른 쪽을 지적하며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대응을 보이는데 이번에는 그 대상이 폴란드가 됐다는 것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