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영국은, 유네스코가 세계 주요 21개 선진국의 어린이 복지제도를 처음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에서 아동 복지가 가장 낮은 순위에 머물러 있다는 결과를 받게 된다. 당시 영국 어린이협회 밥 리트미어 회장은 “충격적인 보고서”라며 개선을 촉구했다. BBC방송은 “국가의 1인당 국내총생산이 높은 것과 아이들의 복지 수준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일침을 가했다.
2008년 영국은 국가놀이전략을 수립한다. ‘Vision 2020’이라는 장기 계획에 따라, 아이들에게 평등한 놀이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본 지는 지난달 런던 현지를 찾아 그곳의 놀이터와 놀이터를 만든 사람들을 만났다.
놀이 정책을 수립하기까지(1991~2007)
1991년 제정된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영국에도 아동의 놀 권리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안겼다. 학계, 전문단체, 지역사회는 아동의 놀이 기회와 다양성이 감소하고 있는 실태를 공표하고 대안을 담은 보고서를 속속 발표했다.
2000년, 영국 역사상 최악의 아동학대 사건이라 불린 ‘빅토리아 클림비 어린이 학대·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1991년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태어난 클림비는 가난을 피해 영국으로 건너와 친척에 양녀로 맡겨졌다. 클림비는 친척과 그녀의 동거남에 끊임없이 학대를 받아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는데, 아이의 몸에서는 밧줄에 묶인 흔적과 담뱃불로 지진 자국 등 128개의 상처가 발견됐다. 클림비는 영양실조 상태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 노동당 정부는 클림비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에 사회 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했는지에 관한 조사를 지시했다. 2년간 380만 파운드(한화 약 65억원)를 투입해 400쪽에 이르는 클림비 보고서를 발간했다. 정부는 영국 사회가 클림비의 생명을 구할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놓치고 말았다면서, 클림비 사건을 교훈 삼아 영국의 아동보호시스템을 전면 개선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곧, 영국 아동복지의 실상과 비전을 담은 정책제안서(Every Child Matters, 2003)와 개정 아동법(Children Act, 2004)이 완성됐다.
2007년 유네스코가 영국의 아동복지 분야의 후진성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영국에선 아동 문제가 또다시 이슈로 부각했다. 미국과 더불어 영국이 ‘꼴찌’라고 발표한 유네스코 보고서는, 세계 최강 국가를 자부하던 영국 시민들의 자부심에 생채기를 내며, 아이들의 행복을 국가가 나서서 지켜주어야 한다는 여론을 이끌었다.
국가놀이전략의 수립(2007)
2007년 영국 아동학교가족부는 향후 10년간의 아동 정책인 ‘아동지원종합계획’에 ‘국가놀이전략’을 포함해 발표했다. 국가놀이전략은 앞서 만들어진 정책제안서와 유엔 아동권리협약 제31조, 개정 아동법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영국은 ‘아동이 성장하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아이들에 가장 가까운 곳에 안전하고 흥미진진한 놀이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영국 정부는 국가놀이전략을 아동학교가족부가 주도하도록 하고, 복권수익금 운영기관(BIG lottery Fund)에서 예산을 가져왔다.
영국 정부는 국가 차원의 놀이 전략을 수립한 뒤, 해당 계획이 지방의 여건에 맞게 잘 녹아들 수 있도록 실무 총괄기관인 ‘Play England’를 설치했다.
중앙정부는 아동의 놀이 기회를 향상시킬 주요 계획으로 △놀이 공간 확충 △아동기 놀이 지원 △안전한 놀이환경 제공 △아동 친화적 지역공동체 구축 △놀이를 지역의 우선순위에 포함한다는 다섯 가지를 설정했다.
세부 계획으론 △지방정부에 놀이 공간 개발 교부금 배부 △놀이전문가 교육 프로그램 개발 △지역 놀이 담당 공무원에 국가놀이전략 교육 △놀이활동가 자격 시스템 개발 △놀이와 관련한 국가 및 지역 지표 개발 △놀이 지침 발간을 중점 추진했다.
2008년에는 국가 놀이 정책을 안내하는 ‘The Play Strategy’를 발간했다. 2010년에는 이 내용을 각 지역 정부와 아동위원회가 일관성 있게 수행할 수 있도록 지침서 ‘Embedding The Play Strategy’를 펴냈다.
영국 놀이 정책의 특징
영국이 놀이 정책을 본격화한 후 가장 중점을 둔 사업은 놀이 공간의 확충이었다. 영국 정부의 대규모 여론조사에서 아이와 부모는 거주지 인근에 더 많은 놀이 공간을 원했다.
해외 놀이 정책을 조사한 우리나라 보건복지부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은 2008~2011년에만 2억3500만 파운드(한화 약 4000억원)를 투자해 3500개의 놀이 공간을 개발했다. 전체 152개 지역 중 30개 지역을 ‘놀이 길잡이 지역(Play Pathfinder)’으로 선정해 추가 교부금을 지원하고, 특히 이 지역에는 놀이 활동가(Play Worker)가 배치된 대형 모험 놀이터를 개발하도록 했다. 놀이 공간의 유지 보수를 위한 비용도 내려보냈다.
영국 정부는 단순히 예산만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각 지방정부에 대해 구체적인 노력과 실행 계획을 요구했다. 이를테면 혁신적인 놀이 공간을 계획하고, 아동·부모·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의견을 반영하며, 장애아동을 위한 계획, 놀이 공간 이동 경로의 안전 확보, 놀이 공간의 지속적 관리 방법을 고민하도록 유도했다. 인력이 제한된 지방정부가 놀이 공간을 개발하는 것을 돕기 위해 전문가 풀을 구성해 지원하고, 관련 지침서(‘Design for Play:A guide to creating successful play spaces’, 2008)도 발간했다. 더불어, 만들어진 놀이 공간에 대한 정보를 부모와 자녀들에게 전파하는 작업에도 주력했다.
학교 내 놀이 공간 개선에도 박차를 가했다. 영국 정부는 21세기의 학교는 아동·청소년뿐 아니라 가족과 지역사회의 요구에도 부응해야 한다며 특히 학교 운영시간 외 놀이 제공을 포함하는 확장된 서비스를 지역사회에 제공하도록 했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놀이를 반영하고, 아동-주도 활동과 성인-주도 활동을 비슷한 비율로 하도록 권장했다. 일선 학교들이 학생의 행복을 위해 적정한 휴식시간을 설정, 놀이와 관련해 활용하도록 했다.
안전한 놀이환경을 제공하는 일도 정부의 몫이었다. 영국 정부는 학교 밖 폭력이 놀이 공간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여론조사에서 실외 놀이 공간의 경우 청소년 폭력이 두려워 자유롭게 이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다수였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놀이터를 감독하는 어른들(자원봉사자, 놀이 활동가)을 두는 놀이터 모델을 개발하고, 범죄가 일어나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명확한 지침을 수립했다. 아이들이 놀이 공간으로 가는 경로를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해, 놀이 공간 인근에 시속 20마일 차량 속도 제한을 두도록 도로 관계 기관에 권장했다. 그러면서도 놀이 공간에는 적절한 위험요소를 포함하도록 했다. 아동은 스스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고, 위험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놀이로부터 이점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놀이 정책을 추진하면서 시민들의 인식 전환에 공을 들였다. 이는 정부 주도이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지역 정부가 아동의 놀이와 여가를 지원하는 계획을 수립할 때 아이들의 요구를 직접 반영하도록 했다. 아동과 관련한 모든 공무원과 현장 관계자들에게 놀이와 아동 친화적 공간의 중요성을 이해시키기 위해 교육프로그램(‘Play Shaper Program’)을 개발하고 시행했다. 이 프로그램의 대상자층에는 학교·아동 관계자는 물론 조경·건축 디자이너, 교통·건강·재건축 관리자, 경찰, 공원·여가 담당자 등이 광범위하게 포함됐다.
같은 맥락에서 놀이와 지역사회 구성원의 건강한 삶을 연결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영국 보건부는 모든 가정이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는 캠페인인 ‘Change4life’ 시리즈의 하나로 ‘Play4life’를 개발, 활동적인 야외 놀이가 소아비만을 방지해 가족의 건강과 복지에 이바지한다고 강조했다.
※ 이 기사는 제주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이뤄집니다.
런던(영국)=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