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했던 ‘천사의 성금’ 도난 … 해피엔딩엔 두 장의 메모 있었다

입력 2019-12-31 16:35 수정 2019-12-31 20:14
30일 도난당했다가 회수된 ‘전주 얼굴없는 천사’의 성금 상자에서 나온 현금들. 충남 논산경찰이 확인한 결과, 모두 6016만 2310원의 돈과 함께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세요”라고 적은 종이가 들어있었다. 연합뉴스 사진.

도난당했던 전북 전주 ‘얼굴없는 천사’의 기부금이 곧 제자리로 돌아온다. “대체 누가, 하필 이 성금을…”이라며 탄식했던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웃음을 되찾았다. 아찔했던 사건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된 데에는 두 장의 메모가 있었다.

첫 번째 주민의 메모였다.

31일 전주완산경찰서에 따르면 노송동주민센터의 도난 신고가 접수된 것은 전날 오전 10시40분쯤. 경찰은 급히 출동해 탐문 수사를 펴던 중 한 주민으로부터 ‘수상한’ 차량 번호를 적은 메모를 한 장 건네받았다.

이 주민은 낯선 차량이 지난주에 이어 이날도 주차돼 있는 데다 번호판이 흰색 물체로 가려져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겨 번호를 적어 놓았다. 결정적 제보였다.

덕분에 경찰은 폐쇄회로(CC)TV를 통해 용의차량을 확인하고 충남경찰청과 공조해 용의자들을 검거했다. 사건 발생 4시간 30여분만이었다.

자칫했으면 큰 충격과 상처로 남았을 사건이 주민의 ‘매서운 눈’으로 조기에 해결될 수 있었다.

이 주민은 31일 민갑룡 경찰청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전북지방경찰청은 “이 주민의 제보로 쉽게 용의 차량을 특정하고 추적에 나설 수 있었다”며 “범인 검거 협조를 인정해 경찰청장 표창을 수여했다”고 밝혔다. 다만 경찰은 제보자의 신원 노출 등을 우려해 표창 수여 사진과 인적 사항은 공개하지 않았다.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세요.”

또 다른 메모는 그 ‘천사’가 상자에 현금과 함께 넣어둔 글귀였다.

기부자는 2000년부터 해마다 적게는 100만원, 많게는 8000여만원의 성금을 몰래 놓고 가면서 “어려웃 이웃을 위해 써달라”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등의 덕담을 적은 종이를 같이 넣었다.

성금의 액수보다 더 묵직한 천사 가족의 따스한 마음을 담은 글귀였다. 그러나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릴 뻔 했었다. 천만다행으로 절도 용의자들을 바로 붙잡고 성금 상자를 회수하고 글귀를 확인하면서 천사네의 심성을 다시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20년째 이어진 남몰래 사랑은 원뜻대로 온전하게 전해지게 됐다. 한때 충격에 빠졌던 전주시민들도 다시 한해를 훈훈하게 마무리 할 수 있게 됐다.

경찰이 회수한 성금 상자에는 5만원권 지폐 100장씩을 묶은 다발 12개와 저금통에 든 동전 등 모두 6016만 2310원이 들어 있었다. 이에 이 천사가 그동안 보내온 성금을 모두 합치면 21차례 6억 6850만 2970원이 됐다.

경찰 조사 결과 충남에 사는 용의자들은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운 뒤 원정 범행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회 선후배 사이인 A씨(35)와 B씨(34)는 전주 천사의 성금을 훔치기로 마음먹고 지난 26∼27일 주민센터 옆에서 잠복 대기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이들은 30일 오전 2시에 다시 현장에 와 기다리다 기부자가 오전 10시 3분쯤 성금 상자를 내려놓자, 부리나케 들고 달아난 것으로 조사됐다.

차량 번호판은 전주로 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물이 묻은 휴지로 가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컴퓨터 수리점을 한 곳 더 열기 위해 기부금을 훔쳤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이날 이들 2명에 대해 특수절도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한편 경찰은 회수한 상자를 내달 2일쯤 노송동주민센터에 가환부할 예정이다. 가환부란 경찰 수사에 필요하거나 법원에 증거로 제출해야 할 경우, 이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압수물을 돌려주는 제도다.

전주=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