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째 몰래 수천만원씩을 기부해 온 전북 전주 ‘얼굴없는 천사’의 성금이 도난당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경찰은 성금을 훔친 30대 용의자 2명을 붙잡아 조사중이다.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전주의 자랑과 숭고한 뜻이 사라질 뻔 했다. 다시 찾게 돼 정말 다행이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30일 전주완산경찰서와 전주시에 따르면 이날 얼굴없는 천사가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 두고 간 성금 상자가 사라졌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이 천사는 이날 오전 10시3분쯤 예년처럼 노송동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천사공원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성금 상자를) 놨으니 가보라”라는 말을 남기고 끊었다. 이에 직원 3명이 현장에 가보았으나, 관련 상자를 찾지 못했다.
천사는 이후 2∼3차례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정확한 장소를 알려줬으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주민센터측은 이 상자를 누군가 훔쳐간 것으로 보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은 주변 폐쇄회로(CC)TV를 통해 며칠 전에 이어 이날도 현장 주변에 세워져 있던 흰색 차량을 수상히 여기고 추적에 나섰다.
경찰은 사건 발생 4시간 30분여만인 오후 2시 40분쯤 A씨(35)와 B씨(34)를 충남 계룡과 유성에서 각각 붙잡았다.
경찰은 이들을 특수절도 혐의로 긴급체포하고 범행 수법과 동기를 캐고 있다. 경찰은 또 이들이 훔쳐 달아났던 상자를 회수해 그 속에 6000여만원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조사 결과 고교 선후배들인 이들은 유튜브를 통해 ‘얼굴없는 천사’의 선행을 알고 그가 올 시기를 예상해 며칠 전부터 주민센터 인근에 차를 세워두고 기다렸다가 범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주의 ‘얼굴없는 천사’는 2000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성탄절 전후로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 수천만원씩이 담긴 종이상자를 놓고 사라진 남성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2000년 4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58만4000원을 놓고 간 것을 시작으로 19년간 적게는 100만원에서 많게는 8000여만원을 놓고 갔다. 또 상자엔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글귀 등을 적은 종이를 함께 넣어 두었다.
이날 도난당했다가 회수한 성금까지 합치면 이 천사가 그동안 보내온 기부금은 모두 21차례 6억 6830여만원에 이른다.
전주시 관계자는 “특히 올해는 이 천사가 나타난 지 20년이 되는 해여서 의미가 있었다”며 “너무나 엉뚱한 일이 생겨 당혹스러웠는데, 용의자를 빨리 붙잡아 정말 다행이다”고 말했다.
한 시민은 “전주의 자랑이자 자부심이 한순간에 사라질 뻔 했다”며 “다시 그 천사의 숭고한 뜻이 잘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주시와 주민들은 천사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여러 사업을 펼쳐 왔다. 시는 2010년 주민센터 옆에 ‘당신은 어둠속의 촛불처럼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참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념비를 세웠다. 2015년에는 마을 이름을 ‘천사마을’이라고 이름 붙였고 지난해엔 주민센터 입구에 천사기념관도 만들었다.
주변 6개 동 주민들도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정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전주=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