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가 아이들의 성장과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인재를 키워낼 핵심 키워드로 주목받으면서, 자연스레 놀이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도로를 중심으로 빽빽하게 건물이 들어선 도시에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공간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21세기의 가장 큰 변화를 도시화라고 한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도시에 살고 있고, 지난 수십 년간 부동산 활황을 등에 업고 개발이 가파르게 진행돼 온 한국과 제주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다.
‘놀이’에 대한 고민 없이, 택지개발이나 학교 설립과정에서 기계적으로 공간을 할당해 지어진 도심의 놀이터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위한 장소로 부족함이 많다. 통상 12세까지의 아이들이 놀도록 만들어진 놀이터가, 이제 막 사회탐험에 나선 영유아들에게나 인기가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무지개색 뒤에 감춰진 강압과 종용
주변의 놀이터들을 둘러보자. 알록달록 화려하게 색칠된 놀이터가 있다. 아이들의 추락에 대비해 바닥에는 우레탄이나 고무매트가 시공돼 있다. 커다란 조합 놀이대가 있고, 주변으로 시소나 그네가 보인다. 놀이시설을 비켜서면 부지 가 쪽으로 나무와 벤치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쾌적하게 서 있다.
한국 놀이터의 가장 큰 문제는 공간의 주인이 놀이기구라는 데 있다. 자연물이 아닌 각각의 시설에는 사용법이 있는데, 아이들이 따르도록 종용한다. 조합놀이터의 경우, 계단으로 올라가 경사면을 타고 조심히 내려오라고 적혀 있다. 계단을 오를 때에는 앞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장난치지 않으며, 계단 양쪽 철제 난간을 꼭 잡아야 한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이시설을 이용하도록 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지만, 놀이 공간을 사용설명서의 지시에 따라서만 이용해야 하는 것은 아이들로서는 곤욕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놀이터를 ‘지시적 놀이터’라고 부른다.
많은 전문가는 “우리나라의 놀이터가 놀이에서조차 규율과 자제를 암묵적으로 강요한다”며 “고무매트 위 놀이기구가 주인공으로 들어앉은 현재의 놀이터들은 재미없는 놀이터”라고 단언한다.
놀이를 제한하는 놀이터
이런 놀이터는 아이들의 기본 욕구를 채워주는 데에도 미달이다. 기구만 있는 놀이터에는 매달릴 곳이 없고, 고무매트로 덮인 바닥에는 선 그을 땅이 없다. 팔 모래가 없고, 만질 물이 없고, 소꿉장난할 나무나 풀도 없다.
전국 대부분 놀이터는 바로 이 ‘고무매트+조합 놀이대’의 구성을 띄고 있다. 제주의 경우 제주 시내에 있는 130여 개의 놀이터(어린이공원)가 모두 똑같은 모양이다.
2020년까지 기적의 놀이터 10곳을 목표로 현재 5곳을 개설한 전남 순천시는, 놀이터에 깊은 모래사장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모래의 깊이를 1m 이상으로 설계한다. 아이들은 파도 파도 끝이 없는 모래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놀이터들엔 모래가 없거나, 기껏해야 10~15㎝로 모래사장 흉내만 낸 곳이 적지 않다. 이런 보통의 놀이터에서는 미끄럼틀과 시소를 한두 번 타고 나면 더 할 일이 없다.
아이들의 행위를 제한하지 않는 놀이 공간으로 모험놀이터가 있다. 이곳에서는 못질, 나무 오르기, 불 피우기 등 대부분 행위가 가능하다. 아이들이 즐거워할 수밖에 없다. 고학년의 아이들에게도 여전히 인기 만점인 이유다. 이런 모험놀이터의 시작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보다 공사현장에서 더 재미있게 노는 것을 발견한 어느 건축가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1943년 덴마크, 이후 코펜하겐 교외에 엔드렙 폐자재 놀이터 개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한여름엔 덥고 뜨거운 우리들의 공간
이처럼 어른들의 무관심으로 재미없게 만들어진 놀이터는 아이들에 대한 배려도 적다.
우선 나무가 없다. 우리나라 놀이터의 대부분은 나무가 아이들이 노는 곳이 아닌 벤치 주변에 들어서 있다. 햇볕을 막아줄 나무가 없으니 여름이면 놀이터엔 아이들이 없다. 한여름 놀이터 고무매트는 흙보다 더 뜨겁고, 철제 미끄럼틀은 탈 엄두도 낼 수 없다.
물도 없다. 앞으로 소개할 영국은 작은 소도시의 이름 없는 놀이터에조차 아이들이 손을 씻거나 목마를 때 대비해 수도꼭지를 만들어둔다. 학부모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는 일본 모험놀이터(동경 시부야 하루노오가와 플레이파크 등)에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도록 중고 옷과 신발을 놀이터 한쪽에 비치한다.
한국에서 놀이터는 종종 어른들의 차지가 되기도 한다. 제주의 어떤 놀이터들은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로 설계됐지만, 언제부턴가 어른들이 사용하는 체육시설이 하나둘 들어와 공간을 차지해버린다.
놀이터를 어른들이 ‘잠식’하면 아이들이 ‘떼’를 지어 놀 수 있는 공간은 점차 사라진다. 일본 총리 관할의 일본학술회의는 2008년 ‘일본 어린이 육성환경을 향하여’라는 보고서에서 아이를 키우는 환경에 필요한 8가지를 제시했는데, 이 중 첫째 환경 요소로 ‘아이들이 떼 지어 놓을 공원광장의 부활’을 제시했다. 아이들은 무리 속에서 더 크게 성장의 계기를 만나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고무매트 주변 풀이 어린이 무릎까지 자라도록 방치된 놀이터, 담배꽁초와 술병이 흉물스럽게 나뒹구는 놀이터도 놀이터의 주인인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놀이터의 한 단면이다. 제주의 놀이터는 마을이 형성된 배경에 따라 놀이터 수의 불균형도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 이 기사는 제주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이뤄집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