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횡령·배임을 저질러 가치가 추락한 투자기업을 상대로 이사를 해임하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국민연금은 투자기업의 잘못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나기 전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할 방침이다. 지난해 도입된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스튜어드십 코드)의 후속 조치로, 기업 경영에 관한 국민연금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국민연금 최고 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27일 경영참여 목적으로 주주권을 적극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을 심의·의결했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지난 7월부터 공청회 등을 통해 주주권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기준과 방법 절차 등을 마련해왔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횡령·배임·사익편취 등으로 가치가 추락한 투자기업이 이를 개선할 의지가 없을 때 관련된 이사 해임과 정관 변경 등을 요구할 수 있다. 국민연금은 기업의 잘못이 최종심을 통해 법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경우에도 주주 가치가 훼손됐다면 개입할 계획이다. 국민연금의 수탁자책임활동 단계는 1년 단위로 설정되나, 해당 기업이 대화를 거부하는 등 개선 여지가 없는 경우 그 기간은 줄어든다.
다만 국민연금이 개입하는 대상 기업은 개선 판단 기준 외에도 산업의 특성과 기업의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정된다. 기업의 특별한 사정이나 산업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감안해 주주제안을 하지 않거나 철회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을 따지는 ‘ESG평가 종합등급 하락 사안’은 ‘중점관리사안’으로 분류돼 관련 주주권 행사가 더 어려워졌다. 모두 경영 간섭을 우려한 재계의 요청으로 추가·변경된 조항이다.
기금운용위 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번 가이드라인의 취지는 기업 경영에 개입하거나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다”며 “기업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기업·주주가치를 제고해 국민연금의 수익성을 올리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장관은 이어 “주주활동이 자의적으로 이뤄지지 않도록 원칙과 기준, 절차를 투명하게 규정함으로써 시장의 예측가능성을 높이려 한다”고 덧붙였다.
재계는 이날 발표된 가이드라인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독립적이지 않은 현행 기금운용위 구조를 감안할 때 정부는 물론 노동계와 시민단체도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주장했다. 국민연금은 “가이드라인 시행과정에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기금운용위 내 소위원회를 구성해 개선방안을 논의하겠다”고 했다.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