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맨’으로 재편되는 美사법부…“수십년간 미국 해칠 것” 우려

입력 2019-12-26 17:33 수정 2019-12-26 17:37

미국 하원의 탄핵 결정으로 경력상 지워지지 않을 오점을 안게 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지만 내년 대선에서 그가 재선에 실패하더라도 확실하게 살아남을 유산 한 가지가 있다. 사법부에 심어놓은 ‘트럼프 사람’들이다. 진보 진영의 활동가들과 시민권 옹호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 어두운 유산이 향후 수십년간 미국 사회를 해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영 가디언은 25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달 초 50번째 연방 항소법원 판사를 지명하면서 현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많은 항소법원 판사들의 후원자라는 지위를 굳혔다고 보도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8년간의 임기 내내 간신히 55명을 지명할 수 있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3년만에 50명을 지명한 것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임기초 3년 동안 지명한 판사들의 수는 25명에 불과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속전속결 자기 사람 심기’의 든든한 지원군은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다. 오바마 정부 때 대법원 판사 인준을 거부하며 시간을 끌던 매코널은 현재 트럼프가 지명한 판사 인준은 빛의 속도로 처리하며 사법부 재편의 행동대장 역할을 맡고 있다.

연방 항소법원은 우리나라로 치면 2심인 고등법원 격에 해당하지만 미 대법원이 연간 100건 가량의 사건만 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최종심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거권부터 생식권까지 미국 시민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미지처럼 미 연방법원이 극단적 보수 일색으로 재편될 경우 차별로부터의 보호나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등 시급한 현안과 관련된 움직임들이 제약받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뉴욕을 관할하는 제2 항소법원을 비롯해 이미 세 곳의 항소법원에서는 보수성향의 판사 수가 진보성향의 판사 수를 앞질렀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22일 트럼프 대통령이 현재까지 대법원 판사 2명을 포함해 연방법원 판사 187명을 지명했으며, 미 전역 항소법원의 경우 판사 4명 중 1명이 트럼프 사람이 됐다고 전했다. 심지어 미 하원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통과시키는 동안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은 대통령이 지명한 제13 항소법원 판사의 임명을 승인했다. 제13 항소법원은 미국에서 대법원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법원이다. 사우스 텍사스 대학의 조시 블랙먼 법학교수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지금이 아마 가장 밝은 순간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WP는 “트럼프가 사법부에 남긴 얼룩이 이미 입법 과정과 민주당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제5 항소법원은 지난 8일 전 정권의 핵심정책인 ‘오바마 케어’의 전국민 의무 가입 조항에 대해 위헌을 결정했다. 보수화된 법원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적 정치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당장 제2 항소법원은 트럼프의 트위터 계정에 악플을 단 사용자를 차단한 사건에 대해 재심리 여부를 결정해야 하고, 제11 항소법원은 선거권 관련 항소를 다룰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법원 판사에 상대적으로 젊은 보수 성향의 판사를 지명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종신직인 연방법원 판사에 자기 사람을 심어 그 효과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다. 진보 단체 ‘정의를 위한 연합’의 법률 담당자인 다니엘 골드버그는 “미국인들은 앞으로 30년에서 40년 동안 그들의 권리와 자유가 처할 위기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