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위험, 자유…아이들에게서 사라진 몇 가지에 관한 이야기

입력 2019-12-26 17:28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에서 한 어린이가 비눗방울 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는 2015년 교육과정을 개편하면서, 도전적이고 자유로우며 자기 주도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을 핵심 인재상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일상에는 이러한 가치를 키워낼 시간이 없다. 학교와 학원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고, 집에서는 다시 학교와 학원에서 했던 일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표는 틈 없이 짜여있고, 놀이터에서는 계단으로 올라가 경사진 방향으로 조심히 내려오도록 사용 설명서가 친절히 적혀 있다. 수동적인 일상에서 자기 주도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제주교육청이 놀이공간 혁신을 시작했다.

미끄럼틀 일색의 학교 놀이터를 아이들이 더 잘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이 시리즈는 일상에서 모험과 모색의 기회를 잃어버린 아이들과, 복원에 나선 제주교육청의 새로운 도전에 관한 이야기다. 놀이를 국가 정책화한 영국의 사례도 현지 취재를 통해 싣는다.

놀이에 모아지는 시선들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성장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유치원을 창시한 독일의 프뢰벨과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를 비롯해 피아제(스위스), 비고츠키(러시아), 호이징가(네덜란드) 등 아동심리와 교육에 조예가 깊었던 세계 수많은 이들이 놀이의 가치에 주목했다.

이들은 놀이가 개인의 인지능력을 향상하고 사회성을 높이며 미래의 위험에 대응하는 능력을 키워준다고 봤다. 놀이를 개인적 활동을 넘어 역사와 문화 속에서 이뤄지는 문명의 한 부분으로 이해한 이도 있었다.

최근에는 아이들의 행복 지수를 높이고,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인재로 키우는 핵심 키워드로 놀이가 주목받고 있다.

현대의 많은 아동 전문가들은 놀이가 삶에 필요한 다양한 가치를 제공한다고 입을 모은다. 공교육이 추구하는 창의성과 자기 주도성 관계성은 물론 놀이가 주는 성취 자유 모험 모색의 과정이 아이들을 즐겁고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향으로 만든다고 본다.

우리의 놀이터는

이처럼 놀이가 성장의 밀알로 부각되면서 자연스레 놀이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놀이터는 어른들의 요구와 행정적 편의를 반영해 지어지면서, 정작 놀이를 위한 장소로는 부족함이 많다.

고무매트와 조합 놀이대를 중심으로 천편일률적으로 만들어진 놀이터에는 선을 긋거나 손으로 팔 모래도 땅도 없다. 그늘을 막아줄 나무도 없다. 기능과 기계적 안전에만 초점을 둔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그네를 타다 시소를 타다 집으로 간다. 학교와 동네의 놀이터는 도시 아이들에게 허락된 마지막 놀이 공간이지만, 아이들에겐 썩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다.

일본 모험놀이터만들기협회(비영리법인) 총괄이사이자 일본 최초의 플레이 워커인 아마노 히데아키는 풍요로운 놀이 환경임을 알 수 있는 지표로서 ‘어린이가 부수어도 되는 것이 얼마나 있는 가’를 제시한다. 그는 아이들은 △잘라서 무언가를 만드는 창작의 반복 △나뭇가지를 보며 다양한 기능을 떠올리는 상상 △놀이 속에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친구들과 부딪히고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며, 이 같은 행위가 가능한 놀이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험놀이터의 왕국 일본에서 40년간 아이들과 함께 해 온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무심코 바라보는 한국의 놀이터들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부족한 공간이었는 지를 깨닫게 한다.

점점 좁아지는 탐험반경…놀이터를 바꿔야 할 또 다른 이유

아이들에게 놀이터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지금의 도시가 아이들에게 친화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도시는 아이들이 걷기에 안전하지 않고, 막대기를 들고 야전사령관처럼 작전을 진두지휘하기에 자연물이 충분하지 않다.

플레이 잉글랜드의 팀 길 감독은 영국의 어느 가정에 대한 조사를 통해, 같은 지역에서 자란 4명의 아이가 어릴 때 다닌 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증조부에서 손자세대로 갈수록 마을을 걸어서 누빈 탐험 반경이 짧아짐을 알 수 있다.

영국 정부의 놀이전략을 수행하는 Play England의 팀 길 감독은 한국 어른들과 만난 여러 공식 강연에서 “현대의 아이들은 감금된 채 길러지고 있다”면서 “아이들의 삶에서 모험이 사라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부모 세대와 아이 세대의 놀이 문화의 가장 큰 차이를 ‘탐험 반경’에서 찾는다. 영국의 어느 가정에 대한 조사를 통해 같은 지역에서 자란 4명의 아이가 어릴 때 주로 다닌 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4명은 가족이지만 서로 다른 세대의 어린이를 말한다.

아이들이 놀며 누빈 공간은 증조할아버지(1919년에 8살, 10㎞ 반경)에서 가장 넓었고, 할아버지(1950년 8살, 1.6㎞), 엄마(1979년 8살, 1㎞), 아들(2018년 8살, 300m)로 내려오며 점점 축소됐다. 특히 영국은 초등학교까지 부모가 직접 자녀를 등하원 시키는 것이 의무화돼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마을을 오가는 일이 적다.

팀 길 감독은 “이런 자유의 축소가 아동기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며 “아이들이 걸어서 누비는 공간이 작아졌기 때문에 우리는 대안으로서 놀이 공간(놀이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 이 기사는 제주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이뤄집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