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 이즈 예능픽 아닙니다…젠지가 너무 강했을 뿐

입력 2019-12-26 16:54 수정 2019-12-26 17:02

“젠지의 벽이 이 정도로 두꺼울 줄은 몰랐습니다.”

GC 부산 어센션(GCA) 김세현 감독은 젠지전 완패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특히 이날 1세트에 선보였던 이즈리얼, 그레이브즈, 징크스 동시 기용 전략, 이른바 ‘3원딜 조합’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이 커 보였다.

GCA는 25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넥슨 아레나에서 열린 2019 LoL KeSPA컵 16강전에서 젠지에 세트스코어 0대 2로 졌다. 1세트에 이즈리얼, 그레이브즈, 베이가, 징크스, 쓰레쉬로 조합을 짰지만 완패했다. 이들이 대세와 다른 챔피언을 여럿 뽑자 일부 LoL 팬들은 “GCA가 패색 짙은 경기에서 ‘예능픽’을 고른 게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장난으로 꺼낸 챔피언들이 아니었다. 사실 3원딜 조합은 GCA가 지난 5일간 준비해온 비장의 무기였다. GCA는 지난 18일 ‘2020 LoL 챌린저스 코리아(챌린저스)’ 승격을 확정 지었다. 직후 휴가도 반납한 채 이번 젠지전을 준비해왔다.

김 감독은 “지난 5일간 3원딜 조합으로 8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했다”고 귀띔했다.

“5일 동안 전략 유출을 막기 위해 해외 팀들과 스크림을 많이 했어요. 야간 스크림까지 해가면서요. 이 전략으로 8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했어요. 베이가가 미드에서 최대한 오래 포탑을 수성하고, 베이가와 쓰레쉬가 앞에서 군중제어기를 걸면 3원딜이 포킹과 카이팅을 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젠지도 우리의 경기나 솔로 랭크 데이터 등을 살펴봤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 개개인이 잘 쓰는 챔피언을 밴할 거로 예상했습니다. 실제로 파이크, 아우렐리온 솔, 루시안을 자를 거란 건 정확히 맞추기도 했고요. 그 챔피언들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차선책 픽 또는 변수 전략뿐이었어요.”

GCA가 준비해온 건 미드를 제외한 4인이 탑에 집결해 스노우볼을 굴리는 전략이었다.

“5분에서 5분 30초가 되면 4명이 탑으로 올라가요. 상대에게 바텀 라인을 주고, 우리는 상체를 베이스로 삼아 탑 포탑을 철거하는 거죠. 빠르면 6분 30초에서 7분 전에 포탑을 철거할 수 있어요. 그리고 8분에 전령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전령 쪽 시야를 잡아서 전령을 먹고, 2차 포탑까지 철거하는 라인을 만드는 전략이었어요.

이즈리얼, 징크스, 그레이브즈가 있으므로 포킹 능력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조합이었습니다. 이즈리얼의 ‘얼어붙은 건틀릿’ 둔화 효과와 베이가의 ‘사건의 지평선’ 스턴 효과 등을 최대한 활용한 뒤 그레이브즈와 징크스의 파괴력으로 게임을 터트리는 그림이 스크림에선 많이 나왔어요.

8할의 승률이 나왔습니다. 코치진이 시간 계산까지 다 했습니다. 6분 30초에서 8분 30초 사이에 포탑을 철거하고, 전령을 사냥하고, 그 시간에 바텀 포탑이 뚫리면 상대가 귀환하는 타이밍에 바텀으로…. 미드 철거를 욕심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바텀으로 가서 시야를 잡고, 그 다음에 미드로 시야를 넓히고, 상대 칼날부리 쪽에서 시야를 잡고, 정면에서 이즈리얼으로 포킹한 뒤 3원딜의 궁극기를 동시 활용해 상대 미드라이너를 집에 보내는 그림이었죠.

이겼을 때는 경기 시간 25분을 넘겨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일 빨리 끝낸 건 15분대였죠. 21분에 이긴 적도 있었어요. 드래곤이나 바론이 중요하지 않은 전략이었어요. 젠지와 정면으로 싸우면 체급 차이가 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빽빽하게 준비한 전략으로 상대를 조금이라도 당황케 만드는 게 목적이었어요.”

하지만 스크림과 실전은 천지 차이였다. 젠지의 기본기가 워낙 탄탄했다.

“이 전략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4분 30초에서 5분 30초 사이의 분기점이었습니다. 징크스가 탑으로 올라가는 타이밍에 BF 대검이 나왔어야 했어요. 그레이브즈도 특정 아이템을 갖췄어야 했고요. 챔피언마다 나와야 하는 아이템이 있었어요.

그런데 4분께에 우리 미드라이너가 ‘비디디’ 곽보성에게 강한 압박을 받아서 스펠이 빠지고, 5분대에 바텀이 다이브를 당하는 등 대참사가 나와버렸어요. 탑에서도 많이 힘들어했고요. 우리 선수들이 연달아 전사하자 라인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듯한 운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스크림에서는 라인전부터 그렇게 터져본 적이 없었어요. 비장의 무기를 썼는데 제대로 문을 열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그냥 게임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어요. 우리 코치도 많이 억울했는지 커뮤니티에 글까지 올렸더라고요.

시간 계산까지 다 하고, 선수들과 의논도 많이 했는데 시작도 못 해보고 졌으니까요. 선수들과 돌아오는 길에 ‘젠지의 벽이 이 정도로 두꺼울 줄은 몰랐다’고 얘기했어요. 2세트 때는 스크림에서 좋은 기록이 나왔던 조합을 꺼내 최선을 다하자고 했죠. 경기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요.”

김 감독은 탑 이즈리얼이 정복자 대신 프로토 타입: 만능의 돌 룬을 선택한 이유도 설명했다.

“사실 이즈리얼이 정복자를 골랐을 때 라인전이 더 센 건 맞아요. 하지만 이 조합의 궁극적 목적은 5분대, 6분대에 시작되는 운영이었고, 그렇다면 이즈리얼이 굳이 탑라인에서 정복자를 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 전략에서 이즈리얼은 베이가와 함께 보험 역할을 해야 할 챔피언이었어요. 라인을 컨트롤하고, 들어오는 상대에 대처하기 위해선 만능의 돌이 더 좋을 거 같았어요. 우리 탑라이너 선수가 전략을 숨기기 위해 솔로 랭크에서는 한 차례도 연습하지 않았을 만큼 조심스럽게 준비했던 전략이었습니다.”

김 감독은 젠지 라이너들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고 지난 경기를 복기했다.

“‘룰러’ 박재혁이 세나로 딜 교환을 워낙 매섭게 하더라고요. 징크스 체력이 200 남으니 부스 안에서 ‘바텀 봐줘야 한다’ ‘탑 올라가야 하는데’ 등의 오더가 겹쳤어요. 스크림 상대들에게도 보완점을 여쭤봤을 정도로 준비 많이 했던 전략인데 사고가 연달아 터졌죠. 끝나고 다들 아쉬워했습니다.

알고는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기면 이변이었고, 저는 승률을 3%로 점쳤습니다. 그렇지만 체급 차이가 확연한데 정면 싸움을 해 주눅 들기보다는, 신인답게 패기 넘치는 전략을 꺼내고, 지더라도 시원하게 졌으면 했어요. 그래야 선수들도 게임에 재미를 느낄 거라 봤습니다.”

끝으로 김 감독은 젠지의 견고함을 극찬했다.

“상대 밴픽을 보니 준비를 많이 해오셨더라고요. 챌린저스 승격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었어요. 상대적으로 네임 밸류가 떨어지다 보니 현직 선수들이 우리를 하수로 본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습니다. 젠지와 붙는 동안은 그런 느낌을 일절 안 받았어요. 상대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표정, 밴픽, 플레이에서 그게 보여요. 어제는 그런 게 하나도 안 보였습니다.

젠지 덕분에 코치, 감독도 밴픽의 보완점 등을 배웠습니다.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희는 챌린저스에 머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곳에도 쟁쟁한 팀이 많지만, 올해 안에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입성이란 야망을 갖고 있어요. 휴가 복귀하면 하드 트레이닝에 돌입하려 합니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