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자] 광주교도소 유골들의 ‘임을 위한 행진곡’

입력 2019-12-26 12:42 수정 2019-12-26 15:35

“교도소 부지는 어디나 최고 명당입니다. 여름철 참기 힘든 찜통더위라면 폭동이 일어납니다. 혈세로 내는 겨울철 난방비도 줄여야 됩니다. 그래서 교도소는 무조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곳입니다.”

오래전 광주교도소장이 대담 도중 내뱉은 촌평이 뇌리에 떠오른 것은 40여구의 미확인 유골이 발견된 지난 20일이었다.

그동안 법무부가 관리하지 않아온 교도소 매장 유골 중에는 구멍 뚫린 두개골과 어린이 추정 유골이 포함돼 5·18 총상 관련 여부가 주목을 끌었다.

DNA 검사를 통해 진실을 가리기로 했지만 5월 단체들은 다시 검찰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5·18 당시 가마니로 아무렇게나 덮고 운반한 시신이 광주교도소에 암매장됐는지를 반드시 규명해달라는 것이다.

며칠 후.

“6·25한국전쟁을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후손들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을 접하게 될 것이다. 광주에서 기자생활을 하는 네가 전면에 나서야 맞는 것 아니냐. 소명의식을 가지고 억울한 죽음과 초라하게 발견된 주검을 끝까지 파고 들어야 돼! 기자인 네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자격이 없거나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유골 발견 이후 송년모임에 참석했다가 아끼는 고교동창으로부터 뜻밖의 충고를 들었다.

평소 방정한 처신과 신중한 언행을 해온 친구였기에 애정 어린 충고는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가지런한 몸가짐으로 항상 따뜻한 말을 건네던 그 친구는 어느 때보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980년 핏자국으로 얼룩진 광주교도소는 현대사의 비극적 현장이다. 3공수여단 16대대 주둔지이던 교도소 앞에서는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담양, 순천으로 향하던 수십여명의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격에 의해 숨졌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친구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군홧발로 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는 과격한 불순분자에 의한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으로 이를 왜곡했다. 지금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골프를 치고 고급음식점에서 12.12 군사반란을 기념하지 않느냐”.

성탄절인 25일.

탐스런 눈 대신 공중에 미세먼지가 자욱한 광주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북쪽 부지를 둘러봤다.

허허로운 무연고 공동묘지터는 붉은 흙더미만 애잔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녹슨 철조망과 함께 ‘접근 금지’라는 팻말이 동토(凍土)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게 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상과 행동까지 제약하는 꽁꽁 얼어붙은 땅.

봉분 속에 감춰졌던 유골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들의 남모를 사연과 주검에 얽힌 진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광주교도소 유골은 미완성의 ‘5·18진상규명’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우리에게 소환했다.

고교 친구의 예상치 못한 충고는 그날의 참상을 후손에게 올바로 가르치고 깨닫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다가왔다.

5·18 행방불명자와 암매장 여부는 그날의 진실을 규명하는 핵심 과제로 여전히 남아있다.

당시 242명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신고됐지만 당국에 의해 인정된 경우는 84명에 불과하다.

아직 시신조차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게 78명에 달한다. 뼈라도 찾아달라는 유족들의 간절함은 서서히 사그라진 모닥불의 재처럼 갈수록 묻히고 있다.

“총체적 5·18진상규명과 광주교도소 암매장 여부는 단순히 5월 단체나 기자들만의 숙제가 아니다. 민주화를 외쳤던 모든 이들과 산자들의 몫이다. 폭도로 매도된 광주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수많은 계엄군들과 시신을 묻은 그들이 생전에 고해성사를 해야하지 않을까.”

충고하는 친구에게 ‘기자’를 대변해 한번쯤 반문하고 싶었지만 분명 어딘가에 묻혀 있을 행방불명자들에게 몹쓸 짓이라는 판단에 금새 움츠러들고 말았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5·18 상징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 광주교도소에서 뒤엉킨 채 발견된 주검이 부르는 노래처럼 귓전에서 끝없이 메아리쳤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