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VIP’(SBS)의 저력은 대단했다. 지난 10월 6%(닐슨코리아)대로 시작한 극은 슬슬 입소문을 타더니 10% 중반까지 올랐다. 깔끔한 연출과 장나라 등 배우들의 호연이 두루 흥행의 끌차가 됐지만, 최고는 역시 궁금증을 유발하는 극본이었다. 백화점 로열 고객을 관리하는 VIP 전담팀원들의 삶을 그린 극은 팀장 박성준의 불륜 상대를 끊임없이 추측하게 만들면서 긴장감을 안겼다. 극 초반 만들어진 그런 서스펜스는 갈등이 심화되는 후반으로 갈수록 고조됐다.
그렇게 본다면 극의 성공에서 배우 이상윤(38)과 표예진(27)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이상윤은 자신의 아내 정선(장나라)과 유리(표예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성준을 특유의 담백함을 묻혀 소화해냈고, 표예진은 신예답지 않은 성숙한 연기로 시선을 붙들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생각하는 VIP는 어떤 드라마였을까.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상윤 표예진 두 배우를 최근 서울 강남구 카페들에서 각각 만났다.
“대사보다 ‘점점점’ 더 많았던 작품 처음”
이상윤에게 VIP는 ‘발전’의 과정이었다. 그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건실한 이미지로 사랑받아왔던 이상윤은 “어떤 상황에서든 내색하지 않는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어 이 작품에 도전했는데, 잘 전달이 됐을지 모르겠다”며 미소지었다.
극의 반전만큼이나 예상치 못했던 것도 있었다. 매회가 끝나면 온라인에는 불륜을 저지른 성준을 향한 손가락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극 자체가 지닌 뛰어난 몰입감도 한몫했을 테다. 이상윤은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에 미움받을 건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반응이 더 컸다”며 “드라마를 찍으면서 이렇게 욕먹기는 처음이었다”고 했다.
“극의 전체적인 감정 베이스가 정선에게 맞춰져 있어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성준이 많은 미움을 받다 보니 연기하면서 때로 힘들 때가 있었는데, 그만큼 극에 깊게 몰입해주신다는 의미라 한편으론 좋았습니다.”
감독은 현장에서 극 중 전담팀 팀원인 현아(이청아) 미나(곽선영) 등 모든 연기자에게 ‘본인이 성준의 내연 상대라고 생각하고 연기를 해달라’고 특별히 주문했다고 한다. 극에서 불륜이 자아낸 긴장감을 논할 때 늘 의뭉스러웠던 성준과 표정과 행동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윤은 “대본을 보면 ‘…’이 대사보다 더 많았다. 정말 극적으로 치달을 때도 ‘정선아’ 한마디를 한다”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인물이었는데, 표현이 정말 어렵더라”고 털어놨다.
한때는 극이 불륜을 미화한다는 불만 섞인 목소리도 이어지곤 했다. 이상윤은 “미화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욕을 먹은 것 같다. 배우들 모두 연기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며 웃어 보였다.
“극도 등장인물들이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 것 같아요. 성준도 결국 모든 걸 다 잃은 후에 무엇이 정말 중요했는지 깨닫게 되잖아요. 담담한 마무리도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절대 바람을 피워선 안 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상대역이었던 장나라와의 호흡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매번 감정을 폭발시키는 정선과 다르게 성준이 감정을 꾹꾹 누르는 캐릭터라 장나라에게 겸연쩍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상윤은 장나라를 두고 “정말 연기를 잘하고, 배려심까지 많은 친구라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며 “내 뺨을 때리는 장면도 마음이 착해 처음엔 NG가 났는데, 딱 두 번 안에 끝내주더라”고 했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훤칠한 외모와 듬직한 이미지로 사랑받아온 이상윤은 팬들의 대표 사윗감으로도 꼽힌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이미지 변신이 망설여지는 점은 없었을까. 그는 “걱정은 없었다”고 답했다. 이상윤은 “연기자는 배역에 따라 시청자분들이 좋아해 주실 수도 미워해 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며 “작품 선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이야기가 재밌는지와 내가 하려는 배역이 설득력 있는 인물인가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상윤은 이승기 양세형 육성재 등과 함께 인기 예능 ‘집사부일체’(SBS)를 통해서도 팬들을 만나고 있다. 그는 “여러 방면의 사부들을 모시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게 특별했다”며 “예능이 많은 팬분과 호흡할 방법의 하나라는 걸 알게 됐다”고 전했다. 농구 마니아로도 잘 알려진 이상윤은 오는 1월 10일부터 방송되는 예능 ‘진짜 농구, 핸섬타이거즈’(SBS)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예능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아 감사해요. 다만 예능인의 모습이 부각 돼 연기자의 모습이 가려질 것 같아 걱정될 때가 있어요. 시청자분들이 제 작품을 보실 때 몰입에 방해되지 않는 선까지만 하고 싶어요.”
성실한 작품 활동으로도 잘 알려진 이상윤은 어느덧 세는 나이로 40살을 앞두고 있다. 그는 “앞자리 숫자가 4로 바뀌는 건 느낌이 확실히 다른 것 같다”고 소회를 전했다. 이상윤은 “이젠 과정보다 결과를 원하는 나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책임감도 갈수록 커진다”고 했다. 연기적 성장을 꾸준히 이뤄나가겠다는 뜻이었다.
“부족함을 느낄 때도 많아요. 지난 11월에 연극 무대에 오르면서는 정말 제 민낯을 마주한 느낌이었어요. 내년에는 깨나가야죠. 부딪치고, 배우고 또 배우면서 조금씩 더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라 언니께 ‘미안하다’ 문자도 드렸었죠”
대학에서 항공서비스과를 졸업해 비행기 승무원이 됐던 표예진은 배우의 꿈을 품고 2013년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표현하는 삶”을 살고파서였는데, 그에겐 연기가 창공만큼이나 자유로운 공간이었던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모님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이런 과감한 선택은 성공한 듯하다.
2016년 ‘결혼계약’(MBC)으로 정식 드라마 데뷔전을 치른 표예진은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닥터스’ ‘쌈, 마이웨이’ 등 인기작에 연이어 얼굴을 비추더니 이번 VIP로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표예진은 VIP를 두고 “연기적 도전을 할 수 있었던 작품”이라며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그간 보여드리지 못한 모습을 내보일 수 있는 발판이 돼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지난해 12월 제작진과 첫 미팅을 가진 후 촬영과 방송을 합해 1년 가까이 이어졌던 VIP는 표에진에게 2019년 전체와 다름없는 작품이었다. 유리의 시놉시스에 쓰여 있던 ‘웬만한 건 유리를 흔들 수 없다’는 문장이 그를 사로잡았다. 표예진은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입체적 인물로 느껴졌다”고 했다.
“물론 그간 맡아왔던 캐릭터들도 조금씩 달랐지만, 가볍고 쾌활한 느낌의 어린 친구들을 많이 연기해왔었어요. 그런데 유리는 힘든 과거에 남모를 아픔이 있지만, 꿋꿋이 버티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하고 싶었죠.”
극 속 성준만큼이나 성준과 잘못된 선택을 한 유리도 많은 지탄을 받곤 했다. 유리는 성준과 혼외자식이라는 공통분모로 얽힌 채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으로 빠져들어 간다. 연기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때때로 힘들진 않았을까. 표예진은 “촬영이 일찍 마무리되고 시청자의 마음으로 드라마를 봤다”며 “시청자분들의 반응이 내가 생각한 유리와는 조금 달라 놀라긴 했지만, 정선이의 심정에도 많은 공감이 됐다”고 전했다.
“정선이가 아주 외롭고 힘들었겠구나 싶었어요. 얼마나 유리가 미웠을까 싶더라고요. 나라 언니께 ‘미안하다’는 문자를 드린 적이 있을 정도로요(웃음).”
“유리가 어떻게 살아왔을지, 또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고민하면서 캐릭터를 다듬어 나갔다. 연기 연습 틈틈이 스타일링에도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드라마를 보면 온유리로 지냈을 때와 친부이자 백화점 부사장인 하재웅(박성근)을 따라 하유리로 살게 됐을 때의 톤 차이를 단박에 느낄 수 있다.
“온유리는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옷을 4~5벌로만 돌려 입었어요. 머리도 까만 고무줄로만 묶었죠. 하유리가 되고 난 후에는 당당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짧은 스커트 같은 의상들을 많이 준비했었어요.”
촬영 현장에서는 이상윤과 장나라의 도움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표예진은 “감정신이 잘 안될 때면 상윤 오빠나 나라 언니에게 많이 기댔다”고 했다. VIP 촬영 현장은 52시간 근무제를 잘 지켜나갔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표예진은 촬영이 끝나고 시간이 날 때면 베이킹이나 스크래치아트 등 취미를 즐기며 재충전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VIP는 어떤 드라마였을까. 표예진은 “소중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반전 소재들이 많이 화제가 됐지만, 저마다 사정을 지닌 타인들이 있고,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도 함께 담겼던 것 같다”고 했다.
“현실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늘 끌리는 것 같아요. 항상 연기를 잘하고 싶다, 작품을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기를 해요. 연기에서 제 진심이 느껴졌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