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전우용에 따르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뒤인 1910년 8월 29일 이후 몇 달 동안 양반 대가들이 몰려 있던 서울 북촌 골목길은 거의 매일 서울을 떠나는 이사 행렬로 붐볐다. 나라가 망한 뒤 양반들의 생계수단인 벼슬자리를 일본인들이 꿰찼으니 입에 풀칠할 길이 막막해지자 가산을 처분해 낙향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골동과 서화도 내다팔거나 버렸다.
그렇게 시장에 나온 골동품과 서화를 찾은 새로운 고객은 일본인들이었다. 한일합병 이후 서울은 일본인들이 밀려드는 도시, 조선인들이 떠나는 도시였다. 이렇게 헐값에 팔려나가고, 혹은 조선인 부역자들이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일본인 권력자에게 갖다 바치기도 하면서 조선시대 고서화는 일본인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일본인 권력층 가운데 조선의 고서화를 수집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1910년부터 1916년까지 조선통감 및 초대 조선총독을 차례로 역임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다. 데라우치가 본격적으로 조선시대 서화를 모으기 시작한 시기는 총독 재직 기간인 1910~1916년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모은 고서화 등 조선 미술품을 총독 직에서 물러나면서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했다. 개관 첫해인 1916년 4월부터 6월에 걸쳐 도자기, 금속공예, 탁본, 서화 등 689건 858점을 기증했다.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개관 당시 유물이 3,305점이었음을 감안하면 그의 기증품은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 것이다. 내용면에서도 국보급 도자기와 함께 금속공예품, 미술사에 획을 긋는 조선시대의 주요 회화 등을 포함하고 있다.
총독부박물관에 컬렉션 기증…조선시대 명품 회화 어떻게 모았을까
기증품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조선의 옛 명품 회화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컬렉션에서는 없던 특징이다. 중국 그림 2점과 일본 그림 1점을 제외하면 한국 그림이 87점이나 된다. 고려 공민왕의 〈천산대렵도〉, 조선 초기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조선 중기 김명국의 〈산수인물도〉와 조선 후기 정선의 〈산수도〉, 김홍도의 〈어해도〉 등 한국 회화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대가의 명품이 화목별로 망라되어 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미술품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토 히로부미가 도자기 수집광이었다면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시대 고서, 서첩, 서화 등의 수집 취미가 강했다. 신문기사에도 소개될 정도였다. 즉, “데라우치 총독은 시국의 대강을 이미 해결함으로 심중의 한가함이 생기면 혹 남산구락에 출왕소요出王逍遙도 하고 혹 골동상 등을 소집하여 우리나라 고미술품을 수집 완상하더라”는 《황성신문》 기사가 그것이다.
그런데, 데라우치의 조선시대 서화 수집은 개인적인 애호 차원을 넘어서 식민지 통치를 위해 문화적 이해를 넓히려는 전략적 접근의 측면도 있다. 일본의 유명한 미술사학자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1862~1913)의 ‘코치’가 있었던 것이다.
오카쿠라 텐신은 메이지시기 아시아 국가 간 문명적 동질성에 주목하고 이를 자민족 중심주의적으로 해석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1912년 5~6월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만나 미술의 중요성과 미술사 속의 한일관계, 박물관의 필요성, 고적 조사, 미술품 제작소, 공업견습소 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데라우치의 조선 고미술 수집은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문화를 활용한 성격이 짙다는 분석이다.
데라우치가 조선에 건너온 지 6년 만에 양과 질에서 탁월한 컬렉션을 구축한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개인적인 수장 욕구를 넘어 권력과 금력에 기반을 둔 조직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수집 활동을 도왔던 인물로는 구로다 가시로黑田甲子郞와 구도 쇼헤이工藤壯平(1880~1957)가 지목된다. 구로다 가시로는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조선사 조사와 규장각 도서의 정리를 담당했다. 또 서책 전문가였던 구도 쇼헤이는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데라우치를 위해 경성 등지에서 조선 고서묵적류를 조사하고 수집했다. 데라우치는 통치 수단이라는 공적 목적과 개인적 애호가 결합되어 수집한 식민지 조선의 고미술품과 전국 각지에서 발굴 수집한 유물을 한자리에 모아 식민지 전시행정을 펴려고 했고, 그런 의도가 실현된 것이 조선 통치 5년에 맞춰 개최한 1915년의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와 공진회에 출품된 미술품, 공진회 전시공간을 활용한 총독부박물관의 건립이다.
데라우치가 전파한 일본인 상류층의 조선서화 수집 취미
식민 통치와 연관된 데라우치의 서화 수집 취미 역시 모방 심리를 낳았을 것이다. 일본인 관료, 은행인, 상공인 등 다른 상류층 일본인에게로 조선 서화 수집 취미가 확산되었다. 1912년 일본인 골동상 스즈키鈴木가 사학자이자 골동전문가로 알려진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의 지도를 받아 조선의 고서화를 전문으로 취급했다는 사실은 1910년대에 이미 일본인 미술품 수요 대상에 조선의 고서화가 포함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경성부의 행정을 담당했다는 후치카미 사다스케淵上貞助의 경우 일본인 사이에 조선 고서화 수장의 ‘선각자’로 평가되는 사람인데, 1914년 본정 2정목 자택에서 입찰회를 열고 조선 서화 수백 점을 판매한 바 있다. 또 상업회의소 서기장을 지냈던 야마구치 세이山口精는 조선 고서화 동호회를 열기도 했다.
관료층을 비롯한 일본인 상류층은 식민지 조선의 고미술품뿐 아니라 당대에 지명도가 높았던 한국 서화가의 그림을 샀다. 당시 최고 인기 화가였던 안중식과 조석진, 그리고 김규진의 그림은 일본인 고위 관료층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11년 4월 11일 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일본인 고위층들은 안중식의 그림 애호가 그룹인 ‘백화회百畵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총무과장을 지낸 와다 이치로花田一郞(1881~?)는 1910년 조선에 온 사람으로 안중식과 조석진의 그림을 자주 주문한 사람으로 꼽힌다. 일본인 관료로 보이는 세키야 데이사부로關屋貞三郞(1875~?) 역시 서화애호가로, 안중식, 조석진, 이도영, 김은호 등 당대의 인기 작가들과 교유하면서 그림을 주문했다. 김은호의 경우 최초의 미술학교인 서화미술회에 학생으로 다니던 1913년, 고작 21세의 나이에 순종과 고종 어진을 차례로 완성하자 ‘초상화의 천재’로 통하면서 초상화 주문이 밀려들었다. 고객으로는 윤덕영尹德榮과 윤택영尹澤榮 형제, 초대 이왕직장관을 지낸 민병석閔丙奭 등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부여받은 이른바 ‘조선 귀족들’과 일본인들로부터도 주문이 들어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은호는 또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 낸 그림을 일본 사람이 사갔다고 술회했다.
이미 개항기 때부터 안중식과 조석진의 그림에는 ‘한인韓人’이라고 쓰인 관지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안중식의 1907년 작 〈월하구폐도〉에는 ‘한인韓人’이라는 관지가 있어 일본인 수요자를 위해 그려진 그림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명문가에서 흘러나온 고서화 일본인 수중으로
개항기 때부터 인기 한국 화가들은 일본인 컬렉터층에게 작품이 팔렸는데, 을사조약과 합병을 거치며 경제의 민족 격차는 심해졌으니 일본인들의 구매 파워는 더욱 커졌을 수밖에 없다. 일본인 수장가층의 확산과 조선시대 고서화로의 영역적 확산은 다시 말하면 한국 구래의 명문 양반가 수장가층의 와해를 의미한다. 그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조선시대 고미술품이 일본인 수집가 혹은 중개상에게 유출되는 현상은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했다. 합병 직전 해인 1909년 그 상황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당시 신문에는 옛 서화와 서책을 파는 행위를 나라 파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꾸짖으며 자제를 당부하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나라 파는 놈을 꾸짖어 깨우다(속): (칠) 옛적 도화 서책과 옛적 기명器皿 등물은 전인(옛 사람)의 손때가 묻어서 후인의 애국심을 발성케 했다. (중략) 이제 경향 각처를 볼진대 고물(골동상을 뜻함)에게 흥정하야 일인에게 파는 자들이 이루 셀 수가 없도다. 일대 영웅이 난세를 당하여 적국과 분투하여 애를 쓸어버리던 보검이며, 평생 학자가 세월을 허비하여 진리를 궁구한 서책이며, 기교한 생각이 특이한 옛사람의 그림이며, 아름답기가 비할 것이 없는 옛적 기명이 일환, 이환, 이십 원, 삼십 원의 헐가로 날마다 신호대판으로 날아가니 일시의 영영세세한 이익을 탐하여 국민 조상의 고물을 외국 사람에게 내어주니 이것도 또한 나라를 파는 자며(후략).
이는 을사조약 체결로 국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고서화와 고서적, 불교미술품 등의 유출이 본격화되자 고미술품을 지켜야 할 민족정신, 즉 ‘문화재’와 등치시키는 새로운 인식이 조선인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 서화수장가이자 민족운동가였던 위창 오세창이 있다. 위창의 문화재 수집은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한 1910년 이후 시작되었다. 국내에 진출한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우리 문화재가 헐값에 팔려나가고 불법으로 유출되자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데 따른 것이다. 이는 이전까지 교양의 차원이나 과시적 취향이었던 고미술품 수집 취미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1915년 《매일신보》는 오세창이 서화 수장품을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로 장첩하기 이전에 친람하고 조선의 유명 서화가 일본으로 유출되는 세태를 비판하는 동시에 조선의 고서화를 수집하는 오세창의 태도와 행위를 높이 평가했다. 이듬해 11월 민족 시인으로 불렸던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장첩된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를 감상한 후 《매일신보》에 오세창의 자택 방문기 〈고서화의 3일〉을 쓰면서 오세창을 ‘조선 고서화의 주인’이라고 극찬했다. 오세창의 수집품 규모는 서화를 중심으로 1,600여 점에 달하며 서화가를 집대성한 인물사전 격인 《근역서화징》을 출간했다는 점에서 다른 수장가들과는 격이 다르다. 그러나 당시의 미술 수요 시장의 움직임이 조선인으로부터의 유출, 일본인으로의 유입이 구조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오세창의 미술품 수집 행위는 그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