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설파했듯이 일정한 취향이 사회계급을 유지시키며 궁극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계급적 정체성을 갖게 한다고 할 때, 이들 일본인 상류층에서 공유된 식민지 조선의 미술품 소장 및 감상 문화는 문화계급적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지배층의 수집 문화가 단순히 개인의 취미 차원에 머물렀다면 이런 광범위한 확산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인 최고위 통치자들은 식민지 통치의 수단으로서 박물관을 설립하여 제도적이고 조직적인 수요를 창출했다. 최고위 통치자의 영향력과 박물관이 갖고 있는 제도적 권위의 결합은 폭발성을 가지며 민간의 미술시장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고려청자광’으로까지 불렸던 이토 히로부미의 청자 애호는 미술품 유통시장에 고려청자를 취급하는 1차 시장과 2차 시장의 동시 출현이라는 미술시장의 변혁으로 이어졌다.
‘고려청자광’ 이토 히로부미가 이끈 수집 붐
상류층 문화의 모방, 즉 수집 계층의 수직적 확산이 일어나 19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고려청자 수요자군은 총독부 관리에서부터 학자 및 연구원, 은행가, 사업가, 법률가 등 다양한 직종으로 다각화된다. 1910년 조선이 공식적으로 식민지가 되면서 서울이 한성부에서 경성부로 바뀌자 경성부윤으로 부임한 카나야金谷, 1906년에 서울에 건너왔던 일본인 변호사 미야케三宅長策 등이 그런 고려자기 수집 대열에 합세한 사람들이다. 미야케는 1906년 통감부 법무원 재판장의 평정관으로 부임했다. 1906, 1907년 도굴범 재판장으로 근무한 이후, 경성에서 변호사 생활을 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부터 한국에서 도굴되어 일본으로 반출된 고려자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국 근무를 자청했던 사람이다.
그리하여 1910년대 초중반이 되면 서울 장안에서 고려자기 품귀 현상이 생겨날 정도로 고려청자는 상류층의 인기 수집품 대상이 된다. 일본의 도자사학자 고야마 후지오小山富士夫는 “1906년경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조선에 머무를 때 고려의 고도자기가 세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게 되었고, 1912년에서 1913년경에는 그 모집열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회고한다. 일본인의 고려청자 수집 열기는 “악머구리 떼 모양으로 거두는 데 여념이 없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왕성했다. 이런 수집 취미의 확산은 “널리 알려지게 된 수집가의 관심이 예술가와 대중 사이를 매개하는 새로운 영향력이 있는 형식이 되는 과정”에 다름이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청자 수집 취미는 이미 여러 책이나 논저에서 다뤘다. 미술기자 출신으로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쓴 이구열은 이토 히로부미를 ‘고려청자 장물아비’라고까지 비난했다. 미야케는 일본인들에 의한 고려자기의 도굴과 수집이 절정에 이른 시기는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 자리에서 물러난 1909년 무렵이라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했다.
“당시 예술적인 감동으로 고려자기를 모으는 사람(일본인)은 별로 없었고, 대개는 일본으로 보내는 선물 감으로 개성 인삼과 함께 사들이는 일이 많았다. 이토 통감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굉장히 수집한 사람이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점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 무렵 닛타新田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이토 통감의 연회석에 대기하고 있다가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던 자인데, 그러다가 여관을 개업했었다. 이토는 틈만 있으면 이 여관에 나타나 닛타를 시켜 ‘얼마든지라도 좋으니 고려자기를 가져오라. 몽땅 사자’하는 식으로 마구 사들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여기서 저기까지 30점, 50점’하는 식으로 선물하기가 일쑤였다. 언젠가는 곤도의 가게에 있는 고려자기를 몽땅 사버린 적도 있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서울 장안에 고려자기의 매품이 동이 난 적도 있었다.”
일본인 상류층에 번진 고려청자 수집 열기…“악머구리 떼처럼 모았다”
이구열은 이토가 통감으로 재임하던 2년여 동안에 일본인 호리꾼들의 도굴품인 고려자기를 수천 점 이상이나 무더기로 사들이게 되자 도굴사태는 절정기로 치닫게 되고 서울과 본토의 일본인들 사이에 고려자기 장사와 수집이 큰 유행을 이루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 다시 미야케 변호사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이토 통감이 골동가게의 고려자기를 몽땅 사들이는 일이 있은 후) 그 경기에 자극되었는지 바야흐로 고려청자에 열광하는 시대가 출현했다.”
그러니 이때까지만 해도 고려자기 중개 장사와 수장 문화는 일본들끼리의 문화였다. 일본인 최고 통치자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맹렬한 고려청자 수요는 일본인 골동상의 출현과 그들의 빠른 시장 장악을 이끌었고, 이들 일본인끼리의 수요-중개 커넥션에 의해 불법 도굴이 조장되었다. “고려자기는 일본인들이 무덤 속에서 파내어 일본인들끼리만 사고파는 진기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초기 개성 부근에서 시작되었던 고려자기의 도굴 행위는 1910년대 들면 낙동강 유역으로까지 범위를 넓혀간다. 1910~1913년 지역별 골동상의 수치는 개성과 가까운 경성부가 있는 경기도 지역에 압도적으로 많고 증가세가 두드러지며, 이외 지역에서는 경주와 김해 고분이 있는 경상남도에 집중적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자기의 수집 취미는 그러나 수요와 공급 논리에 의해 시장에서 가격이 올라가면서 경제력 격차에 의해 진입 장벽을 만들었다. 고려청자는 일제의 권유로 설립된 이왕가박물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집되고 진열되어 그 상품적 가치가 급상승하면서 중산층이 소유할 수 없는 초고가 미술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10년대 후반이 되면 고려자기의 수집은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어떤 미술품보다 계급성을 반영하는 미술품 수장 문화가 된다.
고려자기는 이제 경제력 장벽 때문에 소장할 수 없는 중산층에게는 대체 수요를 통해서라도 충족되어야 하는 욕망이 되었다. 이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대체재로서 재현청자가 인기를 끌게 되기에 이른다.
최진순崔瑨淳이 《별건곤》에 쓴 〈현대공예보다도 탁월한 고려시대의 도자기〉라는 내용을 보자. 그는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언급하며 그 가치를 먼저 발견한 것은 일본인이며 그 덕분에 세계적인 것으로 자랑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참으로 얼마나 지나 사람들이 그것을 귀貴엽고 아름답게 여기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이 고려도자기를 여간히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고려소’라 하여 도자기 중에는 그 이상이 없는 줄 믿고 이것을 한 가보와 같이 귀중히 보존하며 애호했습니다. (중략) 이와 같이 귀중한 것을 고려시대에는 종교상 관습으로 의하여 생전에 쓰던 것을 모두 죽은 후에 그 묘지에 이식하여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지금 대부분의 능지에서 나옵니다. 조선 각지에 산재하여 있으나 고려 왕도엿든 개성부근에서 제일 많이 나옵니다. (중략) 역사상 미술상 이것을 예찬하게 되며, 또 외국인들이 더욱 그 정확 기묘함에 감탄하여 그 가치를 존중히 알아주게 되어 오인(‘나’를 문어적으로 이르는 말)도 가치와 기술이 참으로 우수하고 탁월한 것을 더욱 더 잘 알게 되었음이다. 과연 이것이 우리가 세계 사람들에게 세계문화상에 크게 자랑한 만한 가치가 있고도 남음을 믿습니다.”
1906년 서울에 일본인이 차린 고려자기 골동상점이 처음 등장했는데 불과 20여 년 만에 대중적인 찬탄의 대상이 됐다. 그 연원을 따져보면 일본인 통치층의 고려자기 수집열에서 비롯된 것이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