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회고록의 몇 줄이 한 시대를 압축적으로 증언한다. 조선에서 고려자기 수집 열풍이 불어 닥치기 이전의 초기 단계부터 고려청자 거래에 뛰어들었던 일본인 골동품 상인 사사키 쵸지佐佐木兆治가 쓴 이 글도 그렇다. 무엇보다 사사키의 삶 자체가 고려청자가 미술품으로 탄생 되던 역동적인 시기를 관통했다.
사사키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2월에 조선에 건너왔다. 일찌감치 고려청자 거래 시장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고, 1922년 일본인 골동상인이 연합해 세운 고미술품경매회사 경성미술구락부 창립 멤버였고 나중에는 사장까지 한 인물이다. 그는 1942년, 《경성미술구락부 창업 20년 기념지》를 낼 때 사장 자격으로 이런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이 몇 줄의 문장들은 무덤 속 부장품이었던 고려청자가 땅 속에서 꺼내져 암시장에서 거래되다가 당당히 골동품 가게에서 유통되기까지의 과정을 통찰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우선, 을사늑약 체결로 조선이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에서 통감부의 최고 권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의 영향력이다. 그가 고려자기를 애호함에 따라 도굴품의 거래 행위는 묵인되고 결과적으로 거래가 양성화되는 수순을 걸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통감부 시절 일제의 권유로 설립된 이왕가박물관이 고려자기를 적극 구매하면서 제도적 수요가 갖는 권위와 힘에 의해 ‘무덤 속 기물’ ‘토산품’에 머물렀던 고려자기는 미술품으로서의 전통과 아우라를 갖게 된다.
셋째, 이미 일제강점 이전부터 아가와, 아유가이, 야마구치, 모 재판관 등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요자 사이에 고려청자 애호 문화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본 현지 상류층의 도자기 향유 문화가 식민지 조선에도 이식이 되었고 그 대상이 고려자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들을 차근차근하려고 한다.
청일전쟁 이후 지배자적인 태도로 돌변한 일본
을사조약 체결 후 대한제국에 설치된 통감부統監府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고려청자 수집 붐을 이끈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여러 회고록을 통해 증언되고 있다. 최고 권력자의 사적 취미가 얼마나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개항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주도권 다툼은 마침내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1880년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계기로 청나라에 밀렸던 일본은 1890년대 들어 판세를 뒤엎었다.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종지부를 찍고 지역 패자로 등극한 것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지배자적인 태도로 돌변한 일본의 분위기를 매켄지는 이렇게 전한다.
“1895년 봄에는 심한 흥분과 소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분명히 조선에서의 상권을 휘어잡을 목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5월에 이르러 각국의 외교관들은 일본 세력이 독점적 태도와 상업상의 기회로부터 자신들이 배제되는 문제에 관해 심각히 반발했다.”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후임으로 조선 주차 일본 공사로 부임해 온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일본인 거류민들의 정복자적인 태도를 우려하며 본국에 보고서를 낼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무례할 뿐 아니라 종종 한인들에게 모욕을 준다. 그들은 한인 고객들을 대함에 있어서 천박하게 행동하며, 한인들과 조그마한 오해라도 생기면 서슴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며, 심지어는 한인들을 강물에 처박거나 아니면 무기를 사용한다.”
이러한 일본인의 정복자적인 태도는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극에 달했다. 익히 알다시피 일본은 1895년 친러적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그곳에서 1년을 거주한 후 돌아온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독립국의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바깥세상의 흐름에 둔감했던 조선의 운명은 점점 내리막길을 향해 걸었다. 일본은 러일전쟁까지 벌여 승리한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사실상 지배했다. 일본의 통감부 정치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권한에 대해 매켄지는 이렇게 묘사한다.
“통감은 원하는 바를 모두 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사실상 한국의 최고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공익을 해친다고 여겨지는 법령을 철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며 1년 이하의 징역과 2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형벌권도 가지고 있었다.(중략) 일본인 영사와 부영사가 전국에 배치되어 사실상 지방 장관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경찰관으로 배치되지 않은 곳의 한국인 경찰들도 일본의 사찰을 받았다. 농상공부는 일본인 감독관과 고문의 지배를 받았으며, 고위 관리를 제외한 모든 관리의 임명권은 종국적으로 통감의 손에 쥐어있었다. 여기에서도 고위 관리라는 상한선은 또한 무의미한 것이었으므로, 통감은 사실상 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5년 뒤 한국은 일본에 강제병합 되었다. 한국은 일본인들의 세상이 됐다. 을사조약 이후 한국에 있는 백인들의 지위는 명백히 하락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매켄지에 따르면, 일본 군인이 백주에 길가는 선교사 여인의 가슴을 만지는 성추행을 버젓이 자행하기도 하고, 어느 가톨릭신부는 성당 안에서 일본군에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기도 했다. 이에 따라 1880~90년대 20여 년간 조선의 개항장과 주요 도시를 활보하며 고려자기와 골동품, 민화 등을 구매했던 서양인들은 무대 밖으로 퇴장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상권을 장악한 것 뿐 아니라 미술시장에서도 최대 수요자로 부상했다 . 그 정점에 이토 히로부미와 3대 통감이자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가 있었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인 이주 밀물…미술시장도 장악
‘고려청자광’으로 통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미술시장에 끼친 영향을 다루기 전에 을사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 진출 상황을 개괄해보자. 이는 일본인 미술 수요층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
일본인의 조선 진출은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본격화했다. 일본인의 서울 거주는 1885년부터 허용되었지만 1904년 말 서울 거주 일본인은 5,000여 명에 그쳤다. 하지만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한 러일전쟁 이후 서울 거주 일본인 숫자는 급증하여 1910년에는 3만 5,000명에 근접했다.
이 수치는 1920년이 되면 6만 5,600여 명으로 90퍼센트나 늘어난다. 그러나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의 증가 속도는 1905년(7,677명)에서 1910년 사이에 4.5배 증가한 것에 비하면 빠르지 않다. 그만큼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기화로 일본인의 조선 이주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이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주로 상업에서 생계수단을 찾았다. 1910년 서울 거주 일본인의 30퍼센트가 상업에 종사했다. 진출 초기에 충무로와 명동을 아우르는 지역인 남촌을 거점으로 거주하던 일본 상인들은 한일합병을 거치며 한국인 상인들의 거점 지역인 종로에까지 침투했다. 서울의 북부 지역 땅값이 앙등할 정도로 그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또 공업 부문에서도 일본인은 조선인을 압도했다. 통감부가 실시한 통계에 의하면 1907년 전국의 공장은 70개이며, 이 중 56개 공장의 소유주가 일본인이었다. 그 외에 미국인 공장이 3개, 중국인 공장이 4개였고 조선인 공장은 7개에 그쳤다. 조선인 공장 7개 가운데 5개는 서울에 있었다. 특히 공장 설립년도를 보면 전체 70개 중 50개가 1905년 이후 집중되어, 일본인들이 을사조약을 기점으로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 공업 분야도 빠르게 장악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개항 이후 조선에는 일본의 제일은행, 제18은행, 제58은행 등이 진출했는데, 일본인 상공업 종사자들은 이들 일본계 은행으로부터 자금 대출 등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수 있어 조선에서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다. 1900년 완공된 경인철도는 물류를 통한 물자의 서울 집산을 가져오며 특히 유통 부문에서 일본인 상인들의 영향력이 배가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통감부 정치하에서 시행된 일제의 화폐‧재정 정리로 인해 객주를 비롯한 한인들이 대거 파산했으며 이 공백을 일본 상인들이 차지했다. 이렇게 식민지 한국에서 행정 및 금융‧상공업 분야에 종사하며 중상류층에 편입된 일본인들은 고려청자와 조선 서화 등 고미술품 뿐 아니라 동시대의 인지도 있는 한국인 서화가들의 그림을 구매하는 미술시장의 주요한 수요자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인 중상류층으로 확산된 미술품 수집 문화의 발원지는 일본인 최고위 통치층이다. 그 정점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 호를 기대하시라.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