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질 수 없어야 그리움이다”

입력 2019-12-18 15:18
이야기는 처음으로 촉각을 자각한 그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시작된다. 당시 저자의 나이는 네 살. 그는 스타킹을 신기던 할머니의 손이 까칠해서 싫다고, 아프다고 앙탈을 부렸다. 하지만 지금은 할머니의 거친 손이 좋다. 그 손을 잡으면 네 살배기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언젠가 할머니와 이별할 날이 다가올 게 자명하니 요즘은 할머니와 전화를 할 땐 녹음 버튼부터 누른다. 할머니를 담은 사진이나 영상도 잔뜩 찍어두었다. 할머니 집에 가면 할머니 볼을 만지고, 당신의 팔뚝에 얼굴을 비비다가 까무룩 잠이 들기도 한다. “훗날 시각과 청각으로 그녀를 재생할 수는 있지만 그 넉넉한 품에 안길 수도, 꺼슬꺼슬한 손도 잡아드릴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촉각을 재생하는 기술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제 다 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주 떨려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두 손이자 그녀의 생애를 따뜻하게 잡아드리는 일이다.”


비가 쏟아지는데 비에 젖지 않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사진은 이 같은 상상을 구현한 예술 프로젝트 ‘레인룸’이다. 장대비가 내리지만 저 공간에 들어가면 관람객은 비를 맞지 않는다. 관람객의 움직임을 감지해 사람이 있는 공간에만 강우 밸브가 잠기는 장치가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레인룸의 경험을 체험한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비를 맞지 않고서도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실현되었으나 막상 그런 자유를 오래 누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혜화동 제공


촉각, 오감의 어머니

자, 그렇다면 저런 이야기로 시작하는 ‘촉각, 그 소외된 감각의 반격’은 어떤 작품일까. 서두에 등장하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들큼하고 뭉근한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에세이로 넘겨짚기 쉽다. 제목만 보면 촉각의 세계를 파고든 의학이나 과학 분야의 교양서라고 짐작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예상은 모두 맞다. 저자의 추억담에 촉각의 정체를 살핀 과학적인 정보가 갈마들고, 이 감각을 활용한 다양한 예술 작품이나 전시를 소개한 내용이 포개진다. 급기야 책의 말미엔 저자가 직접 쓴 촉각과 관련된 소설들까지 차례로 등장한다. 촉각의 신비를 느끼게 만드는 사진도 여러 장 실려 있다.

영국 인류학자 애슐리 몬터규의 표현을 빌리자면 촉감은 “오감(五感)의 어머니”다. 감각의 진화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것이 촉각이었다. 몬터규는 “타인과의 신체 접촉이야말로 편안 안심 온기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태아는 크기가 겨우 2.5㎝ 수준만 돼도 눈이나 귀는 없지만 이미 만들어진 피부를 통해 무언가를 느낀다. 인간은 피부의 감각 수용기로 뜨겁고, 차갑고, 아프고, 간지러운 감각을 인지하면서 자신과 세상의 실존을 인식한다.

저자가 세월호 엄마들의 뜨개 전시에서 마주한 문구 '만지고 싶어 죽겠어'. 혜화동 제공


하지만 저런 설명보다는 책에 등장하는 이런 이야기가 촉각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 주효할 듯하다. 저자는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세월호 엄마들’의 뜨개 전시를 관람하다가 “만지고 싶어 죽겠어”라는 문장을 마주하고 가슴이 뻐근해졌다. 이 문장에는 “남겨진 그러나 무너진 사람의 거둘 수 없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남겨진 자에게 죽음이란 신체를 만질 가능성이 영영 없다는 사실 앞에서 무릎 꿇는 일이다. …사람은 기억에서 흐려지고 지워져도 손끝에 맺힌 그리움의 그림자는 지문처럼 남는다. 어쩌면 만질 수 없어야 그리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목에서 촉각을 “소외된 감각”이라고 규정한 이유는 촉각이 시각이나 청각 같은 다른 감각에 비해 관심을 덜 받고 있어서다. 예술만 하더라도 보고 듣는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은 수두룩한데 ‘촉각 예술’은 극히 드물다. 핀란드 건축가 유하니 팔라스마는 건축에서도 만연해 있는 시각중심주의 문화를 개탄하기도 했다. “촉각이 가지는 근접성, 친밀성, 진실성, 동일시, 애정의 측면이 배제되면 인간은 무관심, 소외감, 외면성의 영역으로 밀려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철학자는 디지털 시대의 키워드로 촉각의 상실을 꼽곤 한다. 무언가를 만지고 누군가를 보듬는 일이 줄고 있어서다.

그렇다 보니 요즘 지구촌에선 과거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지난해 영국은 외로움을 사회적 질병으로 규정하면서 ‘외로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했다. 고독 탓에 힘겨워하는 국민들 마음을 어루만져주기 위해서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특히 우리네 ‘신체 문화’는 서구의 그것에 비해 경직돼 있거나 강제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는 좋은 접촉으로 안녕과 위로를 주고받거나 그에 상응하는 신체 상호 작용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며 “나는 자발적이고 일상적인 포옹이 치유의 수단으로서 우리 사회에 녹아들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한다.

덧붙이자면 미국에선 요즘 ‘포옹 서비스’ 업체가 인기다. 업체에서는 외로움을 호소하는 고객한테 직원을 보내 그를 끌어안아 주거나, 포옹을 한 채 함께 누워 있어 주거나, 껴안고 가볍게 어루만져 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당연히 성적 접촉은 금지돼 있다). 이용료는 시간당 80달러 수준인데, 이 서비스는 현재 미국에서 “산업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한국에서도 머지않아 포옹 서비스 업체가 등장할 수도 있을 듯하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 예술가 루시 맥레이가 선보인 전신 포옹 기계. 저 기계를 체험한 관람객들은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친구가 안아주는 느낌을 받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혜화동 제공


“촉각의 비전을 믿는다”

책을 읽으며 우선 놀라게 되는 지점은 저자인 유려한(36)의 박람강기한 재능이다. 그는 철학 미학 과학의 세계를 사방치기 하듯 넘나들면서 근사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촉각을 활용한 마케팅 기법의 현재와 미래를 두루 살피기도 한다. 어려운 철학적인 메시지를 쉽게 풀어내는 글솜씨도 인상적이다(그는 “나에게 바람이 있다면 글은 춤처럼 쓰고 춤은 글처럼 추는 일”이라고 적어두었다). 촉각의 세계를 탐방할 수 있게 해주는 다채로운 예술 작품이나 프로젝트를 일별하게 해주는 점도 이 책이 선사하는 재미다.

저자의 직업이 무엇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쉽지 않은데, 두루뭉술하게 규정하자면 소설을 쓰면서 다양한 전시나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는 자신을 “한국 사회에서 재미를 찾아보려는 재미주의자”라고 소개해놓았다.

저자가 촉각의 가치에 본격적으로 주목한 것은 프랑스 파리에 살던 초가을의 어느 날,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바람을 마주하면서였다. 당시 그는 바람에서 느껴지던 질감 세기 온도를 저장하고 싶다는 객쩍은 상상에 빠져들었고, 당시의 상상은 ‘촉각 재현 기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는 “촉각만큼 재미난 감각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촉각의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날이 온다면 앨범에서 추억의 사진을 꺼내보듯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구의 손길을 다시 느끼는 게 가능해질까. 촉각 기술의 ‘현재’가 어디까지 왔는지 살핀 챕터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내가 촉각 기술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그 근간에는 무엇보다 인간이 있고,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세심하게 향하는 따뜻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촉각과 관련된 과학 기술은 무언가 상실하고 결핍된 사람들을 위해서도 구체적인 희망을 안겨주리라 기대한다. 나는 촉각의 비전을 믿는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