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17일 빈손으로 한국을 떠났다. 전날 비건 대표가 공개적으로 만남을 요청했음에도 북한이 응하지 않으면서 북·미 접촉이 성사되지 못한 것이다. 북한이 대미 협상 시한으로 정한 연말이 10여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협상 재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한반도 비핵화 시계가 2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연말이 지나면 ‘새로운 길’을 걷겠다고 공언한 북한을 향해 “무언가 진행 중이면 나는 실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박3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친 비건 대표는 이날 오후 김포국제공항에서 ‘북한이 왜 응답하지 않은 것 같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떠났다. 비건 대표는 전날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지금 한국에 있고, 당신들은 우리를 어떻게 접촉해야 할지 알고 있다”며 판문점에서 북측과 만나고 싶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조선중앙통신은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8주기를 맞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등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뿐 별도의 대미 메시지는 내놓지 않았다. 최근 들어 미국의 대북 관련 메시지가 나올 때마다 북한이 즉각 담화를 내서 대응해온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북한이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뜻을 이번에 확실하게 미국에 전달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이 미국의 대화 요청에 응하지 않은 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재개 움직임 등으로 ‘레드라인’을 넘어갈 조짐을 보이자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경고 메시지를 다시 내놨다. 트럼프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주지사들과 라운드테이블 행사를 갖던 중 북한 상황에 대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우리는 그것(북한)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북한에서) 만약 무언가가 진행 중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북한을 매우 자세히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많은 곳’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미국이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을 포함해 다른 위험 지역도 모니터링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최근 북한은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에서 ‘중대한 시험’을 두 차례 진행했다고 발표했다.
북·미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대북 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결의안 초안을 제출했다. 북한이 요구해온 제재 해제·완화를 위해 중·러가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 초안에는 대북 금수품목 일부 해제뿐 아니라 남북 간 ‘철도·도로 협력 프로젝트’를 제재 대상에서 면제하는 내용도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는 “지금은 시기상조인 대북 제재 완화를 고려해야 할 때가 아니다”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국 정부는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 재개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김인철 외교부 대변인은 “정부는 주요 안보리 이사국들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관련 사항을 주시하고 있다”며 “현 단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북·미 실무협상이 조속히 재개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의 실질적 진전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손재호 기자,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