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이 청구된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진범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에 보관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과정에서 법원을 통해 검찰과 경찰이 수사한 자료를 최대한 요구하겠다”고 전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17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상대로 확인한 결과 2017~2018년경 국가기록원에 이관한 기록물 가운데 이춘재 8차 사건 기록물이 포함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앞서 이춘재는 경기도 화성에서 벌어진 살인 10건을 자신이 모두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당시 경찰은 이중 8차 사건을 모방 범죄라고 판단하고 윤모(52)씨를 진범으로 지목해 구속했다. 그는 20년간 복역했고 이춘재의 자백 후 재심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 임시 서고에 보관 중인 당시 기안용지 8매 가운데 1매에서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음모) 2개가 남아있었다. 테이프로 붙여진 상태로 30년 넘게 보관돼 온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현장에서는 총 10점의 체모가 채취됐는데 이 중 6점은 혈액형 분석에 쓰였고, 2점은 방사성동위원소 분석(체모 등에 포함된 중금속 성분을 분석하는 기법)에 각각 쓰여 2점만 남아 있었다. 사건 현장 체모 2점이 이렇게 보관돼 있을 것이라고는 수사본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고 한다. 경찰은 지난 16일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하고 체모를 확보한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 이춘재의 것인지 확인할 방침이다.
수사본부는 “사건 발생 이듬해인 1989년 1월 30일 국과수 법의학 2과가 보관 중이던 현장 체모가 이화학 3과(방사성동위원소 감정 관련 부서)로 인계됐다”며 “이를 다시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분석의뢰 했다는 내용의 서류 등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가기록원이 보관하고 있는 체모 2점이 이춘재 8차 사건 현장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며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경찰은 “현행 국가기록물 관련 법률에는 기록원으로 이관된 기록물은 다시 외부로 반출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고 공소시효가 지나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며 “진범을 밝히기 위해선 재심 재판 과정에서 법원에 의해 증거물도 채택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수사본부는 8차 사건 수사에 참여한 경찰관 51명 중 사망한 11명과 소재가 확인되지 않은 3명을 제외한 37명을 수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형사계장 등 6명이 직권남용 체포·감금, 독직폭행 등의 혐의로 정식입건됐다. 수사과장과 담당검사도 직권남용 체포·감금 등의 혐의로 입건됐다. 특히 형사계장의 경우 이춘재가 자백한 ‘화성 초등생 실종’ 사건 수사 당시 피해자 유골 일부를 발견한 후 은닉한 정황도 함께 드러나 사체은닉 및 증거인멸 등의 혐의도 받고 있다.
윤씨의 변호를 맡고 있는 박 변호사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결정적 증거물인 체모 관련 의문’이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최근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 2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며 “파장이 클 것 같아 말을 못하고 있었다. 기사가 나왔기 때문에 몇 가지 의문을 적어본다”고 썼다.
그는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가 모발인지 음모인지 ▲발견된 지점을 특정할 수 있는지 ▲체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안 시점은 언제였고,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한 때 범죄혐의와 관련성이 떨어지는 토끼풀과 창호지에서 디엔에이를 채취하려 했던 적 있기 때문) ▲경찰은 압수수색영장신청의 부담 때문에 공개를 미룬 것인지(검찰에 관련 수사정보가 공개되는 부담) ▲검찰은 이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에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박 변호사는 발견된 체모가 조작된 증거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윤씨의 것으로 바꿔치기 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쨌든 발견됐기 때문에 하루빨리 감정이 이뤄지길 바란다”며 “이 체모가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체모라면 이춘재의 DNA가 나올 것이고, 수사과정에서 윤씨의 체모와 바꿔치기가 된 것이라면 윤씨의 DNA가 나올 것”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지금 검경의 대립은 30년 전 수사과정에서의 불법 자체라기보다는 이를 밝히는 과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30년 전 수사과정에서의 불법은 재심이 열리는 법원에서 철저히 검증할 것이다. 재심과정에서 법원을 통해 검찰과 경찰이 수사한 자료를 최대한 요구하겠다”고 전했다. 또 “당시 불법을 밝히는 과정이 어떤 고려 없이 투명하게 진행되길 바란다”며 “나중에 다 드러난다”고 당부했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서 박모(당시 13세)양이 성폭행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