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신뢰 리스크도 신경써야
타행과 의견 조율 필요해 시간 걸릴 듯
외환파생상품 키코(KIKO)를 판매했던 은행들이 기업들 배상 여부를 두고 ‘눈치보기’에 들어갔다. 은행이 두려워하는 것은 ‘선례 남기기’다. 피해 기업에 선뜻 배상을 해줄 경우 나머지 기업에도 똑같이 배상을 해줘야 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다. 여기에 형사상 배임죄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주주 입장을 살펴야 하는 은행에겐 배상 자체가 경영상 신뢰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 다른 은행과 의견 조율이 필요한 점도 문제다.
금감원으로부터 키코 피해 기업에 배상하도록 권고를 받은 6개 은행(신한·우리·산업·하나·대구·씨티)은 15일 배상 여부를 두고 최대한 신중한 모습이다. 의무도 아닌 권고 사항에 즉각적으로 배상하겠다는 입장을 내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앞서 금감원은 지난 13일 분쟁조정 위원회를 열고 “4개 기업(일성하이스코·남화통상·원글로벌미디어·재영솔루텍)에 키코 상품을 판매했던 은행들이 손실액의 최대 41%를 배상해야 한다”고 밝혔었다.
키코는 환율에 연계한 파생상품이다. 일정 범위 안에서 환율이 움직이면 미리 정해둔 환율에 외화를 팔아 시장가격보다 높은 환차익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범위를 벗어나면 약정 환율과 실제 환율 차액의 2배를 물어줘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에 환율이 급등하는 바람에 이 상품에 투자한 919개 중소기업들이 약 3조원의 피해를 봤다.
은행의 속내는 복잡하다. 먼저 은행은 배상 선례를 만드는 것이 가장 우려스럽다. 금융 당국 측에서 분쟁조정 결정을 내린 건 4개 기업에 불과하나 배상 액수는 약 250억원에 달한다. 만약 나머지 150개에 달하는 기업들도 분쟁조정 절차에 들어갈 경우 액수는 점점 불어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4개 기업에 선뜻 배상해주기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원금손실 우려가 있는 상품에 은행이 배상을 해주는게 ‘당연시’되는 것도 문제다. 파생상품으로 손실을 보면 무조건 은행 책임이라는 인식이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해외금리 연계형 파생결합상품(DLF) 사태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같은 파생상품인 키코까지 연이어 문제가 되고 있다. 배상을 결정 내리면 다른 모든 파생상품에서 손실을 본 고객들이 배상을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그렇게 되면 사태가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주회사에 속한 은행 특성상 주주의 눈치도 고민거리다. 소멸시효도 지난 과거 문제로 배상을 하게 될 경우 주주의 신뢰를 잃게 될 수도 있다. 금감원의 주장대로 형사상 배임죄가 성립되지 않더라도 주주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경영진의 도의적 책임과도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금융권에선 최근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소각하면서 저평가된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는데 주력하고 있을 정도로 주주 신뢰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은행이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어느 한 은행의 단독 결정이 다른 은행의 배상 여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금융권에서는 은행 내부 이사회를 거쳐야 하는 절차 상의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다른 은행과 의견을 조율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필요 시 은행연합회를 거쳐서 은행 공동 입장을 전달하는 식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