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이자 ‘참경영인’으로서 재계의 귀감이 돼 온 구자경 명예회장이 향년 94세 나이로 별세했다. 기업인으로서, 재계의 큰 어른으로서 존경받던 구 명예회장의 영면에 재계에선 추도가 이어졌다.
LG그룹은 구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별세했으며 유가족의 뜻에 따라 빈소, 발인, 장지는 비공개한다고 15일 밝혔다. 유족은 조화와 조문도 받지 않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 문희상 국회의장, 이낙연 국무총리 등의 조화만 빈소에 놓였다. 장례식장 앞에는 가림막과 함께 ‘차분하게 고인을 애도하려는 유족의 뜻에 따라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한다’는 내용이 적힌 천막이 덮였다.
다만 고인과 인연이 깊은 몇몇 재계 인사들은 빈소를 찾아 고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이날 오전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 그룹 회장, 김쌍수 전 LG전자 부회장, 노기호 전 LG화학 사장, 구 명예회장과 함께 일했던 전 LG 경영인 등이 빈소를 찾았다.
도전과 혁신, 기술대국 꿈꿔
구 명예회장은 1970년 LG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래 25년간 ‘도전과 혁신’을 주도했다. 이 기간 동안 LG그룹의 매출액은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다. 특히 주력사업인 화학·전자 부문은 물론 부품·소재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하며 원천 기술경쟁력을 확보했다. 구 명예회장은 현재의 LG그룹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을 갖추며 LG의 황금기를 만들었다.
이는 그가 회장에 오르기 전 20여년간 ‘공장 지킴이’로 일하며 사업 감각을 읽혀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럭키 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현장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이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었다. 상자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가기도 했다. 밤에는 하루걸러 숙직을 하며 오전 5시 반이면 몰려오는 도매상들을 맞았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공장가동을 준비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개발의 중요성을 일찍이 강조했다. ‘강토소국 기술대국’ 신념 아래 연구개발(R&D)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고 했다.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국민 생활 윤택하게 할 제품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보자”며 재임 동안 70여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R&D 강화로 LG의 화학·전자부문 기술 체력은 더욱 탄탄해졌다. 19인치 컬러 TV와 공냉식 에어컨, 전자식 비디오카세트 리코더(VCR), 슬림형 냉장고 등을 국내 최초로 잇달아 선보였다. 구 명예회장도 생전에 “1970년에 냉장실과 냉동실을 분리한 이중 구조의 ‘투 도어(양문형) 냉장고’를 개발한 것과 74년에 개발한 가스레인지, 77년 19인치 컬러TV를 생산한 것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경영 혁신
그는 선진 경영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기업인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했고, 국내 최초로 해외 생산공장을 설립해 세계화를 주도했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곧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구 명예회장은 국경 없는 국제 경쟁을 예견하고 깊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그룹의 전면적인 경영혁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회장 1인의 의사결정에 의존하는 경영체제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자율과 책임경영’을 내세웠다. 전문경영인의 자율경영체제를 확립하고 ‘고객가치 경영’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합작 경영을 통해 빠른 성장을 일궈내기도 했다. 그는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선진 기술과 경영 시스템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경영 혁신에 대한 의지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회장직에서 내려오며 남긴 이임사에서도 “혁신은 영원한 진행형의 과제이며 내 평생의 숙원”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최초의 무고(無故) 승계
구 명예회장은 70세이던 1995년 2월, LG와 고락을 함께한 지 45년째 되던 해에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되며 재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70세면 아직 은퇴를 거론할 나이도 아니었지만 고인의 ‘경영 혁신’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것이다.
은퇴 이후 고인은 자연인으로서 소탈한 삶을 보냈다. 그는 충남 천안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 농장에 머물면서 버섯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았다.
재계에선 추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고인이 일선 기업현장을 물러나시면서 후대에 남기신 경영혁신 정신과 은퇴 이후 교육·사회공헌활동에 힘써오신 모습은 지금까지도 많은 기업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고 애도했다.
전경련은 “고인은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위대한 기업가였다”며 “공장에서 직원들과 동고동락하며 대한민국의 화학산업을 일궜고, 전자산업을 챙기며 기술 입국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발인은 17일 오전에 가족장으로 진행된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