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74) 미얀마 국가고문이 반인륜 범죄를 단죄하는 국제사법재판소(ICJ) 피고석에 섰다. 과거 민주화 운동과 인권의 아이콘에서 로힝야 종족 말살을 옹호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BBC 등은 10일(현지시간) 수치 고문이 네덜란드 헤이그의 ICJ 법정에서 열린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 종족 말살 혐의에 관한 공판에 출석했다고 전했다. 이번 재판은 지난달 아프리카 서부 이슬람 국가 감비아가 ‘이슬람협력기구’(OIC)를 대표해 미얀마를 ICJ에 제소하면서 시작됐다.
불교 국가 미얀마의 이슬람계 소수종족 로힝야는 2017년 미얀마 군경의 유혈 탄압 속에 74만명이 이웃 방글라데시로 피란했다. 유엔 조사위원회는 미얀마군에 의해 대량 학살과 성폭행이 자행된 로힝야 사태를 종족 말살로 규정했다.
이날 ICJ에서 아부바카르 탐바두 감비아 법무장관은 “우리의 총체적 양심에 지속적으로 충격을 준 무분별한 살해와 야만행위, 자국민에 대한 종족 말살을 중단할 것을 미얀마에 명령하라”고 재판부에 촉구했다. 법정 밖에서도 미얀마 단죄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이날 미국 재무부는 로힝야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최고사령관 등 군 수뇌부 4명에 대해 제재를 부과했다.
미얀마 정부는 군경이 이슬람 무장조직 소탕작전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직적인 종족 학살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이날 심리에는 수치 고문이 변호인단을 이끌고 피고석에 앉아 혐의 내용을 들었다.
수치 고문은 15년간이나 가택 연금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미얀마 군부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여 세계적인 인권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미얀마의 실권자로서 군부의 로힝야 탄압에 대해 침묵하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일부 사실로 확인된 미얀마군의 학살 관련 주장이나 보도를 가짜 뉴스라고 깎아내려 종족학살의 동조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치 고문이 직접 변호인단을 이끌고 ICJ 법정 피고석에 출석한 이날은 28년 전 오슬로에서 수치 고문의 장남이 노벨평화상을 대리 수상한 날이다. 탐바두 장관은 이날 심리 후 취재진에게 “수치 고문이 계속 종족 학살 혐의를 부정한다면 극도로 실망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미얀마 곳곳에서는 수치 고문을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다.
수치 고문이 예상과 달리 로힝야 사태 재판에 참석해 국내 정치 상황을 의식한 행보라는 지적이 많다. 개헌을 위한 군부의 협력이 필요한데다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실제로 민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부는 수치 고문이 주도 중인 헌법 개정 노력에 대해 비협조적이다.
이날 법정에 나온 수치는 학살을 옹호하는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가디언은 수치가 첫 심리 내내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고 전했다. 수치 고문은 11일 심리에서 직접 미얀마 정부를 변호할 예정인데, 종족학살이 아니라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를 막기 위한 정당한 조처였다는 기존 입장을 반복할 것으로 보인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