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대선…시진핑의 대만·홍콩 강경책이 차이잉원 살렸다

입력 2019-12-11 15:53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연합뉴스

지난해 11월 24일 치러진 대만 지방선거에서 차이잉원 총통이 이끄는 집권 민주진보당(민진당)은 참패했다. 민진당은 22개 현·시장 자리 중 고작 6개를 얻는 데 그쳤고, 야당인 국민당은 15곳이나 차지했다.

올림픽에 ‘차이니스 타이베이’가 아니라 ‘대만’으로 나가자는 국민투표도 부결됐다. 민진당 주석(당 대표)인 차이 총통에 대한 불신임이나 마찬가지였다.

독립 추구 성향인 차이 총통이 2016년 집권한 이후 ‘탈중국화’ 정책으로 본토와 자꾸 부딪히자 피로감이 커진 대만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고 ‘안정’쪽에 표를 던졌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본토에서는 “양안 관계의 평화적 발전을 공유하려는 대만 민중의 희망을 크게 반영했다”고 환영했다.

‘낙제’ 점수를 받은 차이 총통은 곧바로 민진당 주석직에서 사퇴했다. 그가 레임덕에 빠질 것이고 2020년 재선도 물 건너 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한류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국민당 한궈위(韓國瑜) 후보가 직할시인 가오슝(高雄) 시장에 당선되면서 일약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그 후 1년이 지났다. 그때 벼랑 끝에 몰렸던 차이잉원 총통은 화려하게 재기했다. 게다가 한달 뒤 열리는 대만 총통 선거에서 재선이 유력시되고 있다.

10일 대만 빈과일보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민진당 후보인 차이 총통의 지지율은 50.8%로, 국민당 후보인 한궈위 가오슝 시장의 15.2%보다 35%포인트 이상 높았다. 현재 추세로 볼 때 한 시장의 역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차이 총통의 재기를 도와준 것은 역설적으로 ‘앙숙’인 중국이다. 대만 국민들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탈중국’을 외치는 차이 총통에게 사실상 정치적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올들어 중국이 대만을 무력과 외교력으로 자극하면서 새로운 판을 깔아줬다.

차이 총통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중국이 차이 총통을 확실하게 밀어내기 위해 군사·경제·외교 등 전방위로 대만을 몰아붙이다 오히려 역풍을 맞은 것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1월 “대만을 무력으로 통일하는 방안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혀 대만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어 중국 전투기들이 대만 해협 상공의 중간선을 넘어 들어가는 등 위기를 고조시켰다.

지난달 17일에는 중국 제1호 국산 항공모함 002가 항모전단을 이끌고 대만해협을 통과하는 무력시위를 했다. 동중국해를 거쳐 간 002함 항모전단에는 미군과 일본 해상자위대의 군함이 추적하고, 대만군도 정찰기와 군함을 002함 근처에 파견해 감시했다.
군복 차림의 차이잉원 총통.연합뉴스

중국의 군사적 압박이 거세지자 차이잉원 총통은 지난 6월 대만 공군이 진행한 비상활주로 훈련 현장에 군복을 입고 군화까지 신은 채 나타났다.

차이 총통은 훈련을 마치고 “국토와 주권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굳건히 지키고 양보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주권과 민주주의 수호자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차이 총통은 앞서 4월에도 공군 전투비행단을 찾아가 조종사 복장으로 F-16 전투기 조종석에 앉기도 했다.

중국이 대만에 대한 외교적 고립 전략을 가속화한 것도 대만의 반중 민심을 자극하는 역효과를 냈다.

지난 9월 남태평양 섬나라 키리바시 공화국과 솔로몬제도가 대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2016년 차이잉원 총통 취임 후 엘살바도르, 도미니카공화국, 부르키나파소, 상투메프린시페, 파나마 등을 포함해 7개국이 대만과 단교했다. 현재 대만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15개국으로 줄어들었다.

중국 정부는 중국은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대만 수교국에 대만과 외교 관계를 끊으라고 회유하는 전략을 써왔다.

중국은 또 지난 8월부터는 본토 주민의 대만 자유여행을 금지하는 경제적 보복 조치까지 동원해 대만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중국의 의도와 달리 대만 총통 선거 구도가 ‘대만과 중국’ 구도로 바뀌면서 차이 총통의 지지도를 올려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대만인들.연합뉴스

6월부터 본격화한 홍콩 시위와 경찰의 강경 진압 사태는 차이 총통의 지지율을 확고하게 굳혀주는 계기가 됐다.

중국 정부까지 무력시위로 개입하고 나서면서 홍콩에서 대혼란이 벌어지자 대만에서는 “우리도 홍콩처럼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확산됐다.

중국 중앙정부는 홍콩에 외세가 개입해 체제 전복을 추구하는 ‘색깔 혁명’ 기도가 일어나고 있다며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고 배후에서 강경 진압을 주문했다. 시진핑 국가주석까지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을 만나 “폭력과 혼란을 제압하고, 질서를 회복시키라”고 지시했다.

198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을 거쳐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된 대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홍콩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대만에서는 홍콩처럼 중국의 일부가 되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는 대만의 미래가 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퍼졌다. 지난 6월 여론조사에서 중국 본토와 대만이 통일돼야 한다는 응답은 13.6%에 그쳤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최고 지도자들이 대만 통일방안으로 일관되게 주장해온 일국양제에 심각한 파열을 초래한 것이다. 역으로 홍콩에 대한 중국의 강경 대응은 ‘반중’을 기치로 내건 차이 총통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대만 국민당 대선 후보인 한궈위 가오슝 시장.

반면 중국 본토에 뿌리를 둔 친중 성향의 국민당 후보인 한궈위 시장은 이대로 가면 참패를 면하기 어렵게 됐다. 대만 국민들의 여론은 “무조건 중국은 싫다”는 게 압도적인데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국민당의 설자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 시장은 지난해 11월 “떼돈을 벌게 해 주겠다”(大發財)는 경제 구호로 돌풍을 일으켜 민진당의 20년 아성인 가오슝에 깃발을 꽂으며 단숨에 대선 후보로 떠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반중 정서가 이미 대만 전역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친중’ 꼬리표를 단 한 시장은 마땅한 선거전략조차 세우기 힘든 상황이어서 고전하고 있다.

중국이 반중 인사인 차이잉원 총통을 떨어뜨리려고 대만에 총공세를 폈는데 오히려 중국과 친한 국민당의 한 시장을 벼랑 끝으로 모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