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총리의 ‘독재 프로세스’…언론·사법 장악 후 이번엔 문화

입력 2019-12-11 06:00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헝가리의 우파 민족주의 지도자인 빅토르 오르바 총리가 자신의 독재 체제를 공고히 만들기 위해 사법과 언론 영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데 이어 문화·예술 분야까지 검은 손을 뻗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9일(현지시간) 헝가리 정부가 극장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고 전했다. 법안은 새로 만들어진 국가문화위원회가 문화 분야의 전략 방향을 결정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에 따라 문화 단체들은 국가의 복지 및 발전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 콘텐츠 제작 방향에 실질적 제약이 가해지는 것이다. 법안은 또 정부과 지방자치단체가 공동 출자한 극장의 경우 문화 분야 전반을 감독하는 인적자원부 장관이 직접 감독을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

문화 분야까지 장악하려는 오르반 정부의 야욕에 문화·예술인들과 시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의회 법안 부결을 촉구하는 국민 탄원서에 현재까지 5만여명이 서명했다. 헝가리의 유명 배우와 극장 감독들은 이번 계획이 국가 국민 생활의 대부분을 통제하던 공산주의 시대를 떠올리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수도 부다페스트의 시내에서는 2000여명의 시민들이 추위와 빗줄기 속에서 법안 반대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돼지들아, 극장에서 손 떼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오르반 총리는 2010년 재집권 이후 정부 비판 언론을 탄압하고 의회와 사법부를 장악하는 등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해왔다. 체계적인 프로세스에 따라 헝가리를 독재화하고 있는 모양새다.

오르반 총리와 여당 피데스는 우선 언론에 재갈을 물려 정권 비판을 무디게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오르반 취임 후 헝가리 정부는 연간 정부 광고 예산을 예전의 4배에 달하는 3억 달러(약 3500억원)으로 증액했다. 친정권 매체에 집중적으로 광고를 집행해 언론 길들이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상 정부가 돈으로 언론사를 줄 세우고 있는 셈이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에서 헝가리는 2006년 10위를 기록했으나 2014년에는 64위까지 떨어졌다.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이 돌연 폐간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오르반 독재 체제를 공고화하는 일의 정점은 ‘행정법원’의 설립이다. 오르반이 이끄는 여당 연합이 의석의 3분의 2를 장악한 헝가리 의회는 지난해 12월 행정법원을 1년 안에 출범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선거법 관련 사건, 부정·부패 사건, 집회·시위 관련 공안 사건 등 집권세력과 관련된 사건을 기존 법원이 아닌 신설되는 행정법원에서 처리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이다.

문제는 행정법원 판사에 대한 인사권을 사법부의 대법원장이 아닌 오르반 총리가 임명하는 법무장관이 행사한다는 데 있다. 행정법원의 판사에 대한 임용, 승진, 교육의 권한을 행정부 인사에게 몰아줘 독재 정부가 통치 체제에 민감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의 수사·기소는 물론 재판까지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