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게 2-0으로 이기다가도 중요한 순간 범실이 나오면 분위기가 확 죽었어요. 허무하게 지다보니 하나 하나 다 안 된다고 생각했죠. 불안하고 초조했어요.”
9일 경기 수원의 KB손해보험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프로 3년차 레프트 김정호(22)는 연패의 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KB손보는 올 시즌 프로배구 V-리그 개막전에서 한국전력에 승리한 뒤 12경기를 내리 졌다. 12연패는 구단 최다 연패 신기록. 권순찬 감독이 사의를 표명할 정도로 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런 KB손보는 이달 들어 극적 반전에 성공했다. 지난 3일 OK저축은행에 감격의 셧아웃 승리를 거두며 연패를 끊어냈다. 7일엔 6연승으로 잘 나가던 우리카드에 0-2로 끌려가던 경기를 뒤집는 대역전극도 펼쳤다. 김정호는 “연패를 끊은 뒤 사표 내려고 했던 게 미안하다고 말하시는 감독님께 죄송해 울컥했다”고 떠올렸다.
12연패 뒤 2연승. 김정호는 반격의 중심에 서있다. 우리카드전에선 2017년 데뷔 후 개인 최다인 22점(성공률 43.90%)을 올렸다. 트리플크라운(블로킹·서브에이스·후위공격 3개 이상)에 블로킹 2개만이 모자란 활약. 역전극을 완성한 5세트 마지막 서브에이스도 김정호 작품이었다.
자신을 짓누르던 부담감을 벗어던진 게 주효했다. 삼성화재에서 데뷔한 김정호는 주로 원 포인트 서버로 활용돼 코트에 설 기회가 적었다. 지난해 11월 KB손보로 트레이드된 뒤에도 주전 선수들의 뒤를 받치는 역할을 했다. 올 시즌은 달랐다. 손현종(대한항공)과 황두연(상무)이 팀을 떠나면서 김정호는 공격의 한 자리를 책임져야 했다. 자연스레 부담이 따랐다. 경기 중 범실을 하면 동료들에 미안해 마음에 담아뒀다가 경기 후 사과를 건넬 정도였다.
권 감독의 세심한 조언은 그런 김정호에게 자신감을 찾아줬다. 김정호는 “감독님이 ‘김정호 이놈은 하수네 하수’라고 농담하시며 경기 중 범실에 계속 얽매이지 말고 바로 털어내라고 하셨다”며 “이후 다음 플레이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숙소에서 한 방을 쓰는 베테랑 김학민(36)을 보면서 어린 김정호는 프로 선수의 자세를 배운다. 2006년 데뷔해 대한항공에서 지난 시즌까지 맹활약한 김학민은 KB손보에 온 첫 시즌부터 주장을 맡아 어린 선수들을 이끌고 있다.
김정호는 “확실히 몸 관리를 잘 하신다. 오후 10시면 취침하시고 쉬는 시간엔 보강운동도 하신다”며 “학민이형과 똑같이 따라하진 못하겠다. 그래도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로 먹방과 경기영상을 보다가 늦게 잤던 부분은 자연스레 고쳐졌다”고 웃으며 말했다.
김정호는 ‘궂은일도 잘 해내는 선수’를 꿈꾼다. 어릴 땐 화려하고 멋진 플레이를 하는 선수만 눈에 띄었다면, 경기를 보는 관점이 생긴 뒤엔 리시브로 팀에 도움을 주는 선수들을 본받고 싶어졌다고 한다.
“아직 멀었어요. 중요할 때 정확하게 밀어줘 (황)택의형이 좀 더 편하게 (토스)할 수 있게 리시브를 더 잘 하고 싶어요.” 리그 6위에 올라 있는 리시브도 많이 발전하지 않았냐는 말에 김정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러면서 “(전)광인이형, (정)지석이형, (곽)승석이형처럼 공·수 능력을 다 갖춘 플레이를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전망은 밝다. 권 감독은 “김정호는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근성을 갖춘 성격”이라며 “수비 능력만 더 보완한다면 완벽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김정호는 팬들을 떠올렸다. “연패하는 동안 응원해주신 팬 분들에 경기력을 못 보여드려 죄송했어요. 앞으로도 좋은 경기 할 테니 계속 찾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원=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