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대 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18년째 진행 중인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숨기고 국민들에게 장빗빛 거짓 전망만 반복해서 내놓았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미 역사상 최장기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아프간전에서 지금까지 미군 2300명이 숨지고, 20만589명이 부상을 입었다.
워싱턴포스트(WP)는 9일(현지시간) 정보공개법(FOIA)을 근거로 입수한 2000여 페이지 이상의 미 정부 기밀문서와 탐사보도를 통해 정부가 숨겨 왔던 아프간전의 진실을 폭로했다. WP는 이 기밀문서를 확보하기 위해 3년간의 법적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문서는 미 연방당국 차원에서 아프간전 평가를 위해 만든 것으로 미 장군과 외교관 등 아프간전에 직접 관여한 고위 당국자, 구호단체활동가, 아프간 당국자 등 400여명의 생생한 증언이 담겼다. 여전히 미국이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수렁으로 묘사되는 아프간전에 대해 이들은 한 목소리로 “별다른 진전이 없다”고 고백했다.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아프간전 고문 역할을 맡았던 3성 장군 출신 더글러스 루트는 2015년 “우리는 아프간에 대한 기본적 이해조차 결여돼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고 털어놨다. 이어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맡은 임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2001년 이슬람 테러단체 알카에다의 9·11 테러 직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걸고 아프간전을 시작했지만 정작 현장의 군인들은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도널드 럼즈펠드조차 “도대체 누가 악당인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네이비실(해군특전단)에서 은퇴하고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 당시 백악관에서 일했던 제프리 에거스는 “1조 달러(약 1191조원)을 (아프간전에) 들여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 돈을 들일만한 가치는 있었던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아프간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생각하면 오사마 빈라덴은 아마 물속 무덤에서 비웃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1년 오바마 행정부 시절 미군은 알카에다를 이끌었던 빈라덴을 사살한 뒤 그의 무덤이 성지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시신을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라비아 해에 수장했다. 죽은 빈라덴이 비웃을 만큼 미국이 천문학적 비용을 아프간전에 쏟아부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뜻이다. 증언에 참여한 당국자들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민주적 현대 국가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돈을 낭비했다며 실패를 인정하기도 했다.
미 정부가 의도적으로 아프간전의 성과를 포장하며 대중의 인식을 호도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왜곡된 통계수치가 발표됐고, 아프간 수도 카불부터 워싱턴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거짓된 내용의 성명들이 나왔다. 9·11 테러 후 빈라덴을 숨겨줬던 탈레반이 아프간에서 축출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2013~2014년 미군 지휘부 선임 고문으로 복무했던 육군 대령 밥 크롤리는 “모든 데이터가 가능한 한 최고의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고쳐졌다”며 “예를 들어 설문조사의 경우 우리가 아프간에서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조작됐다”고 고백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