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은 한국 경제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회사 몸집을 불리고 해외 무대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세계경영은 오늘날에도 일부 경영인들 사이에선 ‘로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재무건전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투자, 20조에 달하는 분식회계 등은 그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자본금 500만원으로 창업한 ‘샐러리맨 신화’
1960년 한성실업에서 바이어로 일을 시작한 김 전 회장은 67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직원은 5명으로 시작했다. 당시 500만원은 지금 화폐가치로 약 1억9000만원 수준이다. 창업 초기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의류 원단 및 자재 공급 사업을 해왔는데, 김 전 회장은 탁월한 사업수환을 발휘해 창업 5년 만에 수출 100만 달러를 달성했다. 70년대에는 중동붐을 타고 회사를 급격하게 성장시켰으며, 70년대 후반에는 현대그룹, 삼성그룹, 럭키그룹(현 LG그룹)에 이어 재계 4위에 도약했다. 70년대 중반에는 동양증권,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문(대우전자),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등을 인수하며 더욱 몸집을 불렸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81년 대우그룹 회장에 오른 김 전 회장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90년대에는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동유럽을 거점으로 삼고 세계경영을 본격화 했다.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했다. 김 전 회장은 1년 중 280일을 해외에 체류할 정도로 해외 경영 활동에 매진했다. 대우의 해외고용인력은 1993년 2만2000명에서 1998년 15만2000명으로 늘었다. 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달러로 당시 우리나라 수출총액 1323억달러중 약 14%나 됐다.
대마불사(大馬不死)와 IMF
대우그룹은 98년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대우실업에서 시작한 지 30여년 만에 현대그룹에 이어 재계 2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대우그룹의 몰락은 IMF와 함께 찾아왔다. 투자를 통한 몸집 불리기에만 주력했던 대우그룹은 400%가 넘는 부채 비율, 구조조정을 등한시 한 무리한 확장 때문에 한 순간 몰락했다. 당시 정부는 기업의 부채비율을 200% 아래로 내리도록 했지만, 대우그룹은 아랑곳 않고 공격적인 투자로 일관했다. 98년 3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오른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내세우며 성장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는 오히려 김대중정부와 대립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98년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표류하고, 금융당국이 기업어음, 회사채 발행 제한을 가하자 대우는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삼성, LG 등 다른 대기업이 구조조정과 부재비율 줄이기에 나섰지만 대우그룹은 기조를 바꾸지 않았고 해외 증권사들의 경고가 잇따랐다. 대우그룹은 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해체됐다. 당시 부채 규모는 500억 달러였다. 그 해 11월 1일 김 전 회장은 13명의 그룹 사장단과 함께 경영포기를 선언하고 회장 직에서 물러났다. 대마불사 신화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베트남에서 꿈꾼 ‘인생 2모작’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로 2006년 징역 8년6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대우그룹 분식회계 규모는 97년 19조원, 98년 21조원에 달했다. 당시 대기업들이 어느 정도 분식회계를 하는 게 관례였다고 해도 대우그룹의 분식회계 규모는 상상이상이었다. 대우그룹은 안 팔린 물건을 해외로 보내고 수출한 걸로 매출을 잡는 방식으로 회계를 부풀린 것으로 알려졌다.
사면 이후 김 전 회장은 말년을 베트남에서 주로 보냈다. 베트남에서 골프에 매진하던 그는 2010년부터 번찌 골프장에서 인생 2모작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김 전 회장은 취업대란에 시달리는 한국 청년들을 위해 청년 양성가 계획(GYBM)을 구상했다.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GYBM 프로그램은 해외청년취업·창업 분야에서 사실상 선구자다. 김 전 회장은 한국에서 투병에 들어간 2017년 말 이전까지 번찌 골프장에서 머물면서 GYBM의 성공 안착을 위해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