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 좌파 색깔로 정체성 잡은 獨사민당, 배후엔 89년생 리더

입력 2019-12-09 17:23 수정 2019-12-09 17:27
사민당의 구세주로 떠오른 케빈 퀴네트 청년 사민당 의장이 6일(현지시간) 베를린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89년생 정치인이 독일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올해 나이 30세로 독일 사민당(SPD)의 청년 조직을 이끌고 있는 케빈 퀴네트가 그 주인공이다. 퀴네트는 중도좌파 노선을 견지하며 지난 10년간 중도우파 기민당(CDU)·기사당(CSU) 연합과 손잡고 대연정을 구성했던 사민당을 뿌리부터 개조시키고 있다. 당 지도부 일원으로 앞장서 선명한 좌파노선을 외치며 당의 메시아로 떠올랐다. 사민당의 좌향좌에 기민당 소속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끌어온 ‘10년 대연정’은 붕괴 위기에 봉착했다.

로이터통신은 8일(현지시간) 지난 6~8일 베를린에서 열린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퀴네트 청년 사민당 의장이 가장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전당대회 첫째날 ‘메르켈 대연정’에 부정적인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와 자스키아 에스킨이 대의원 투표를 거쳐 공동대표로 최종 추인됐지만 전대 기간 내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한 건 퀴네트였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독일 언론들은 지난 2017년 11월부터 청년 사민당을 이끌고 있는 퀴네트를 조명하는 기사로 도배됐다.

독일 유력 주간지인 데르 슈피겔은 퀴네트를 사민당의 머리 위에서 당을 탈바꿈시키는 사람으로 묘사하며 “공동대표에 오른 두 약소 후보의 승리는 곧 퀴네트의 승리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독일 정치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두 대표는 이번 당대표 선거에서 청년 사민당 당원들에게 몰표를 받았다. 8만표에 달하는 이들의 표는 사민당 전체 당원의 5분의 1에 달했는데 퀴네트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동원한 것이었다. 트위터에서만 15만2000명의 팔로어를 거느리고 있는 퀴네트의 정치적 영향력이 중도 성향의 후보들을 패퇴시킨 것이다. ‘대부’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사람’ ‘사민당 새 왕좌의 막후 실력자’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리는 퀴네트는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사민당 부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며 지도부에 입성했다.

퀴네트의 급부상은 당의 정체성과 노선을 잃고 헤메는 사민당의 현실에서 비롯됐다. 나치에 저항하고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 탁월한 정치 리더들의 지도 하에 한때 40% 지지율을 기록했던 유서 깊은 정당은 애매한 행보 속에 지지율 10%대의 변변찮은 정당으로 쪼그라들었다. 청년과 부유층 당원들은 녹색당으로 떠났고, 전통적 지지층인 노동자들은 좌파당과 극우세력인 독일대안당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이 와중에 급진적인 노동·사회 정책, 부유세, 야심찬 녹색 이슈 선점으로 요약되는 퀴네트의 선명한 좌파 색채는 사민당에 신선한 충격을 안기고 있다. 직장 경험이라고는 콜센터 직원 3년이 전부인 퀴네트가 독일 기성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15세 때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 퀴네트는 사민당이 자신들의 좌파 정체성에 대해 좀더 확신을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지난해 초 당내에서 메르켈 보수 대연정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두각을 드러낸 그는 올해 초 ‘강화된 사회 정의’를 촉구하며 ‘BMW 등 대기업의 집단 소유’라는 도발적 담론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전당대회 연설에서 “사민당을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을 계속하며 당의 비전을 개발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우중충한 정장들로 가득한 전당대회장에서 퀴네트가 입은 밝은 빛깔의 녹색 셔츠는 화제가 됐다.

전당대회 마지막 날 사민당은 부유세 도입을 당의 장기 목표로 설정했다. 선명한 좌파 노선 설정을 공식화한 셈이다. 새 공동대표들은 사민당이 대연정에 일단은 잔류하되 대연정 다수파인 기민당·기사당 연합을 상대로 최저임금 인상, 기후변화 추가대책 등을 요구키로 했다. 대연정 협약서에 이 같은 내용을 반영하도록 협상에 나서겠다고도 했다. 중도우파 연합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민당의 급진적 변신에 메르켈 대연정이 붕괴 위기에 몰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