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된 트럼프?…좌충우돌 시트콤 같았던 나토 회의 이틀

입력 2019-12-05 16:53 수정 2019-12-05 16:54
3일 저녁(현지시간) 나토 7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영국 버킹엄 궁에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뒷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출처 캐나다 CBC 영상

한 편의 시트콤 같았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4일(현지시간) 막을 내렸다. 서방 최대 안보동맹체가 창설 70주년을 맞았다는 기념비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회의가 열린 이틀 내내 파열음을 일으키며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동맹의 가치를 돈으로만 환산해 방위비 인상을 압박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동맹체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회의 첫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나토는 뇌사” 발언을 두고 그와 날선 신경전을 벌이며 회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발단은 캐나다 방송 카메라에 포착된 영국·프랑스·캐나다·네덜란드 정상들의 ‘트럼프 뒷담화’ 장면이었다. 영상을 보면 전날 영국 버킹엄궁 저녁 기념행사 자리에서 ‘트럼프 절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을 향해 피식 웃으며 “그게 당신이 늦은 이유냐”고 묻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끼어들어 “최고이신 분이 항상 40분짜리 기자회견을 하기 때문에 늦은 것이다. 40분짜리!”라고 대신 답한다. 상대국 정상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조차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를 비꼰 것이다.

트뤼도 총리는 자기 턱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처럼 손짓을 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그걸 발표했을 때 그의 팀 입이 떡 벌어지는 것을 봤냐”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내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미 대통령 전용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연다고 갑자기 발표하자 보좌진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함께 자리에 있던 마르크 뤼테 네덜란드 총리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딸인 앤 공주도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이 트럼프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주요 외신들은 ‘최고이신 분’ 등의 표현을 들어 뒷담화의 대상을 트럼프 대통령으로 특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수모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앤 공주가 어머니의 나무라는 눈길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트럼프 대통령과의 악수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뤼도 총리를 향해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뒤끝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트뤼도는 멋진 남자지만 내가 캐나다의 방위비 지출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2%가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자 그의 기분이 나빠진 것 같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했다. 동맹국 방위비 인상을 위한 자신의 노력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트뤼도 총리가 자신에게 뒤끝을 보였다고 지적한 것이다.

미국의 방위비 인상 압박은 이번 나토 회의에서 모든 이슈를 잡아먹는 블랙홀이었다. 런던에 도착하기 전부터 “미국인들을 위해 싸우겠다”고 공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나토 동맹국들이 이미 GDP 대비 방위비 비율을 2024년까지 2%대로 늘리겠다고 약속한 상황에서 “4%는 돼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증액을 요구했다. 응하지 않을 경우엔 무역 보복에 나서겠다는 위협도 덧붙였다. 나토 회원국 가운데 ‘2% 방위비 지출 약속’을 지킨 8개국 정상들에게만 점심을 대접하며 이를 ‘2% 납부국가들과의 업무 오찬’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공동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공동선언문에 명시하는 등 소련을 대체하는 새 견제 대상을 설정하며 안보동맹체로서의 결속을 다지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미국과 유럽국가들이 중국의 통신장비업체 화웨이 제재에서 엇갈린 입장을 나타내며 불협화음을 예고했다. 미국은 중국의 스파이 행위에 악용될 수 있다며 화웨이 장비를 이용하지 말라고 촉구했지만. 나토 회원국들은 존슨 총리가 “해외로부터 들어오는 투자에 불필요하게 적대적이고 싶지 않다”는 발언하는 등 ‘무조건 동참’과는 거리가 있는 반응을 보였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