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정은에게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KBS2·이하 동백꽃)은 특별했다. 4일 드라마 종영을 맞아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은은 “소외된 이웃들을 생각하게 하는 극이라 좋았다”며 “특히 비혼모의 이야기와 가족 개념이 희미해진 시대 속 이웃이 해야 할 역할을 두루 되새기게 하는 극이었다”고 떠올렸다.
실제 동백꽃의 인기가 싱글맘 동백(공효진)과 청년 용식(강하늘)의 담백한 로맨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은 어촌 마을 옹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진득한 휴머니즘은 묵직한 감동을 안겼다. 시청률 상승도 동백꽃의 인간미 덕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극은 기록을 계속 갈아 치우더니 23.8%(닐슨코리아)까지 올랐다. 그리고 그 중심엔 동백의 엄마 정숙 역을 소화한 이정은이 있었다.
정숙은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극심한 가난에 동백을 고아원에 맡겨야 했던, 그야말로 신산한 삶을 살았던 인물. 이정은은 작가 임상춘에게 그 공을 돌렸다. 그는 “정숙의 헌신을 보면서 나의 선입견도 깨게 됐다”며 “대본을 보면서 엄마의 힘을 새삼 느꼈고, 시청자와 마찬가지로 감동했다”고 전했다.
“제게도 부모님과 가족처럼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동백에게 삶의 동기였던 필구 같은 존재도 있고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개인적 이야기들을 이 동백꽃을 통해 전한 셈이죠.”
그에게는 ‘올해의 배우’라는 수식어가 꼭 어울린다. 지난해 하반기 ‘미스터 션샤인’(tvN)으로 예열을 마친 이정은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눈이 부시게’(JTBC) ‘타인은 지옥이다’(tvN) ‘동백꽃 필 무렵’ 등 출연하는 작품마다 걸출한 연기실력으로 시선을 붙들었다. 최근 ‘기생충’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들어 올린 그는 “봉준호 감독님도 그렇고 모든 분이 이정은이란 사람을 관찰하고 어울리는 배역을 주신 덕분”이라며 겸손해 했다.
시대적 변화도 언급했다. 여성 서사의 확대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줬다는 뜻이었다. 이정은은 “‘미스터 션샤인’의 함안댁 역할도 옛날이었으면 남성이 하지 않았을까 싶다”며 “‘기생충’에서도 남편의 위기를 극복하는 선진적인 면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그런 서사를 원하게 된 시대적 변화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2019년은 그에게 새로운 얼굴을 발견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간의 작품에서 주로 귀여운 면모를 지닌 엄마의 역할을 주로 해왔던 그는 ‘타인은 지옥이다’ 등 호러와 스릴러물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이정은은 “내가 그런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더라”며 “물꼬를 한 번 트니 비슷한 얼굴을 자주 요구하시는데, 선한 역이 덜 들어올까 걱정”이라며 웃었다.
봉준호 김은숙 임상춘 등 내로라하는 유수의 제작진들과 호흡해 본 느낌은 어땠을까. 이정은은 “뛰어난 분들은 모두 24시간을 쪼개 치열하게 사는 분들이란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봉 감독님은 촬영하고 콘티를 그리는 틈틈이 배우들과 티타임을 가지면서 작품 얘기를 나누세요. 김은숙 작가님은 잇몸이 상할 정도로 글을 쓰시니깐 사람들이 쉽고 재밌게 받아들이는 드라마가 나오는 것 같아요. 임상춘 작가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점들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잘 알려졌듯 이정은은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나와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해 오랜 시간 무대에서 내공을 다졌다. 연기 학원 교사부터 마트 아르바이트, 녹즙판매원 등 여러 일을 40세까지 병행하면서도 늘 꿈을 좇았다. 이정은은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며 “배우의 얼굴이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떠올렸다.
최근 배우 강부자는 우연히 만난 이정은에게 “나 젊었을 때보다 더 예쁘더구나. 드라마 잘 봤다”는 격려를 전했다고 한다. 이정은이 꿈꾸는 배우의 모습도 이와 맞닿아 있었다.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그것이었다.
“출중한 후배들이 정말 많아요. 그 친구들에게 손뼉 쳐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최근 여러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는데, 강부자 선생님을 보면서 이런 큰마음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제 역할도 비슷한 것 같아요. 주인공을 지지해주면서,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람, 그게 바로 조연이죠.”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