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스포츠에 수십 명의 ‘카나비’ 있다

입력 2019-11-28 00:04 수정 2019-11-28 00:04
한 ‘리그오브레전드(LoL)’ 프로게이머는 아무런 사전 논의 없이 월급이 줄어드는 일을 겪었다. 그는 “처음에는 월급이 90만원 정도였다”며 “그런데 2달 만에 70만원으로 떨어졌고 이후 40만원으로 내려갔다. 나중에는 30만원까지 갔다”고 말했다. 팀원과 연습생이 늘어날수록 입금되는 액수가 낮아졌다고 한다. 이 선수는 “월급이 줄어드는 일에 대해 팀원들과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며 “그런데 한 팀원은 ‘나는 안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비교적 잘하는 친구였다”고 전했다. 구단이 선수의 동의도 없이 월급을 줄였으며 기량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는 선수의 월급부터 먼저 깎았다는 얘기였다.

그는 계약을 맺기 전 계약서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미성년자이고 어려서 내가 봐도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를 것 같았다”며 “계약서 분량은 한번 종이를 넘기면 끝나는 느낌이었다. 선수 등록용으로만 썼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게임을 하면서 돈을 받으니 당시에는 그것만으로도 좋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구단 맘대로 임금을 감액할 수 있다는 내용의 불공정 조항을 LoL 구단 계약서에서 본 적이 있다”고 지적했다.

프로게임단 측이 선수들을 통째로 ‘잘라버린’ 경우도 있었다. 한 구단은 최근 소속 선수들에게 “임금을 더 못주겠으니 나가라”고 통보했다. 계약 기간이 두 달 가량 남아있었는데도 남은 급여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구단 측은 “임금 미지급에 합의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돈을 받으려면 소송을 걸어서 이겨야 할 것”이라는 언급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선수들이 에이전시를 통해 법적 절차를 진행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됐다. 구단이 계약서에 명시돼 있는 벌금 조항들을 전부 동원해 압박했기 때문이다. ‘남은 임금을 지급 할 테니 계약서상 물어야 하는 벌금을 다 내라’는 식이었다. 선수들은 결국 남은 임금을 포기하고 팀을 떠났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기업 대 개인이라서 합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월급보다 소송 싸움으로 나가는 돈이 더 커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지난 8월 31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열린 '2019 우리은행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서머 결승전 현장. 라이엇게임즈 제공.

언급한 사례는 ‘e스포츠 종주국’ 한국의 민낯이다. 국민일보는 e스포츠 관계자들을 심층 취재하고 일부 에이전시로부터 불공정 계약 사례집 등을 입수해 분석했다. 불공정한 계약과 구단 측의 횡포는 업계 도처에 널려있었다. 프로게임단 ‘그리핀’ 소속 LoL 게이머 ‘카나비’(게임상 닉네임) 서진혁(19)군의 ‘강압 이적 의혹’ 사건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20대 초반, 미성년자가 대부분인 프로게이머들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어른들에게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당했다. 계약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하는 일은 일상이다.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일이라 가족들에게도 선뜻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현실은 상황을 악화시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카나비 사태’ 같은 일이 LoL 구단 중 그리핀에서만 일어났겠느냐”고 지적했다. 다른 관계자는 “구단들이 계약할 때 제대로 된 설명을 안 해주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지난 봄 ‘리그오브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LCK)’ 대회는 ‘스무살우리 LCK Spring’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 e스포츠 팬들은 최근 불공정 계약 논란이 불거진 후 ‘스무살우리’를 ‘스무살노예’라고 부른다. 지난해 기준 LCK에 참여한 프로게이머 27.5%는 19세 이하 미성년자였으며 평균 연령은 20.8세에 불과했다.

리그오브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LCK)에 참여하는 프로 게이머들의 연령 통계

갑자기 계약 조건이 바뀐 경우도 있었다. 한 프로게이머는 최근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위해 구단 측과 접촉했는데 계약서 내용이 앞서 협의한 사항과 달랐다. 당초 합의했던 계약 기간이 1년에서 3년으로 바뀌어있었다. 구단 측은 “계약 기간 1년을 고집하면 다른 조건을 안 좋게 바꿔버리겠다”고 협박했다. 해당 선수는 새롭게 다른 구단을 접촉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부당한 결정에 따라야 했다. 한 프로게임 구단 관계자는 “구단에서는 해당 선수를 기용할 의사가 없는데 다른 팀에 주기 싫어서 묶어놓고 있는 경우도 있다”며 “구단에 잘 보여야 주전으로 기용될 수 있기 때문에 선수들이 항의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 한다”고 말했다.

한 에이전시 관계자는 “월급을 점점 줄여 놓은 뒤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꼬셔 해외 이적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며 “이적료로 구단은 돈을 벌게 되지만 선수는 해외에서 임금체불 등 문제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에이전시 관계자는 “원래 자유계약 과정에서 에이전트들의 수수료는 한 번만 발생 한다”며 “몇몇 에이전트들은 순진한 선수들을 속여 매년 수수료를 떼 가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리그오브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LCK)에 참여하는 프로 게이머들의 연령 및 연봉 통계

국내에서 가장 리그 규모가 큰 LoL에 비해 ‘오버워치’, ‘배틀그라운드’ 등 리그 규모가 작은 쪽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한 업계 에이전시 관계자는 “‘오버워치’ 프로게이머들 중에서는 ‘카나비’가 장담컨대 최소 30명은 될 것”이라고 털어놨다. 한 전직 오버워치 구단 관계자는 “급여를 ‘후려치는’ 문제가 제일 크다”고 털어놨다. 그는 “아무리 게임 리그의 규모가 작더라도 프로로서 수년 간 일하면 돈 100만원이라도 남아야 하는데 그것도 없는 선수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어 “급여에서 교통비, 전화요금 내면 남지 않는 정도다. 그런 팀이 80%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막상 구단에 들어와 보니 처우가 좋지 않아 팀을 떠나려고 해도 위약금 액수가 상당하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위약금 자체가 현실에 맞지 않다는 소리는 나온다”며 “1000만원 단위가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선수가 그 액수를 내기는 힘든 게 현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계약을 신중하게 해야 하는데 선수들이 그럴 만한 상황이 못 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다른 관계자는 “위의 사례는 예전 일”이라며 “이제는 그런일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해명했다.

한 에이전시 관계자는 “몇년 전 배틀그라운드 선수 몇 명과 에이전시 계약을 시도했는데 그때 선수들의 월급 액수가 100만원 미만이었다”며 “정식 근로 계약이 아니다 보니 서비스 제공에 대한 대가를 일정 액수로 계약하는 형식을 많이 취한다. 일종의 편법”이라고 말했다. 이어 “에이전시를 구단이 대행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며 “구단과 선수와의 계약을 구단이 중재하는 것이다. 이러니 계약 내용에 얼마나 문제가 많겠느냐”고 지적했다.

오버워치 팀의 불공정 계약 문제는 2016년 10월 한 차례 불거진 적이 있다. 당시 오버워치 팀 ‘마이티스톰’은 ‘선수 일방 계약 파기 시 프로 활동 금지, 직간접 투자 비용 2배 지급’ ‘비밀유지서약 위반 시 2000만원 즉시 배상’ 등 불공정 조항을 계약서에 포함시켜 논란이 됐다. 당시 협회는 이 사건을 조사한 뒤 “선수권익에 반하는 상황”이라며 “강력한 대응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3년 뒤에도 같은 상황은 반복되고 있다.

지난 7월 열린 리프트 라이벌즈에서 경기 준비 중인 ‘카나비’ 서진혁. 라이엇 게임즈 제공

전문가들은 e스포츠계의 불공정 계약이 뿌리 깊은 관행이라고 말한다. 20년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게임을 하고 돈을 받는 개념이 생소했던 게 사실이다. “게임을 시켜주면서도 돈을 주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식이었다. 2017년 기준 e스포츠산업 규모가 1000억원에 달하는 등 시장이 커지고 팬층도 두터워졌지만 선수들에 대한 처우 개선은 그래서 더뎠다. 전통스포츠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린 프로 게이머들을 통제하려면 강압적인 방식이 유효했다는 변명도 있었다. 한 에이전시 관계자는 “처우나 계약서 내용이 초창기 e스포츠 질서에 맞춰져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구단 측이 선수를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아이’로 본다. 팀 운영이나 계약서에 그런 관점이 그대로 녹아있다”고 말했다.

27일 추천 수 20만을 돌파한 '카나비 사태' 관련 국민 청원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불공정 관행에 대한 e스포츠 팬들의 분노는 뜨겁다. ‘카나비 사태’와 관련한 청와대 국민청원은 27일 20만 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 답변 대상이 됐다. 청원이 시작된 지 1주일 만이다. 아울러 e스포츠 구단 계약서를 전수조사 해야 한다는 새로운 청원도 이날 게시됐다.

한국법조인협회 e스포츠연구회 소속 윤현석 변호사는 “e스포츠계에는 국가기관이나 공신력있는 단체가 만든 규약 등 법제화된 부분이 없다”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최소한 표준계약서라도 만들어야 한다. 후진적 시스템으로는 세계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부처는 불공정 계약 문제에 대해 전수 조사를 하고 시정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동성 윤민섭 이다니엘 기자 the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