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 시퍼랬던 내 동생” 고문·사망 ‘수원 용의자’ 형의 울분

입력 2019-11-27 10:29

이춘재(56)가 최근 자백한 수원 여고생 살인 사건의 당시 용의자 명노열(당시 16세·사망)군의 가족이 심경을 밝혔다. 명군은 당시 경찰에 폭행 및 고문을 당해 뇌사 판정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명군의 형 명모(49)씨는 27일 서울신문에 “동생의 명예 회복을 위해 경찰이 꼭 사과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명군은 죽은 뒤에도 지난 30년간 살인 용의자 꼬리표를 떼지 못했고, 가족은 그동안 고통받으며 살아갔다.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은 1987년 12월24일 여고생 김모(18)양이 실종됐다가 이듬해 1월4일 수원 화서역 인근 논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경찰은 같은 달 6일 “사건 현장 인근에서 명군과 친구가 불을 피우고 있었다”는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명군을 연행했고, 고문 끝에 “김양을 강간 살해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하지만 범인이 아니었던 명군은 세부적인 살인 정황에 대해선 답하지 못했다. 경찰은 살인 증거물인 김양의 시계를 찾겠다며 명군을 데리고 야산에 갔지만 명군이 “시계 행방을 모른다”고 답했다. 수사가 어렵게 되자 경찰은 명군을 성당에서 6200원을 훔친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고는 명군을 여고생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다.

수사는 고문과 폭행 위주로 이뤄졌다. 대한변호사협회 인권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수원경찰서 소속 경찰관 3명은 명군에게 자백을 강요하며 일명 ‘비행기 태우기’(몸을 포승줄로 묶고 공중에 매달아 돌리는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했다.

명군은 경찰서로 연행되고 일주일 정도 지나 고문 등으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 이후 한달여 뒤에 사망했다. 경찰은 당시 명군 유가족에게 사망 위로금 6400만원을 전달하며 합의했다. 고문 연루 경찰 3명은 폭행치사 혐의로 징역 1~6년의 실형을 살았다.

명씨 가족은 명군 사망 뒤 30년간 고통받으며 살아갔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자책하며 세월을 보냈고, 아버지는 술에 의지해 살다가 2004년 사망했다.

명씨는 동생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는 경찰 연락을 받고 찾아간 병원에서 본 동생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명군의 발바닥은 시퍼랬고 얼굴과 몸은 퉁퉁 부어있었다고 한다. 명씨는 “의사가 폭행 흔적이라고 확인해줬다”고 전했다. 그는 “동생은 당시 경찰 주장처럼 불량배가 아니었다”며 “경찰도 없던 일을 꾸며 내려니 가혹행위까지 한 것”이라고 호소했다. 이어 “동생 사건 이후 경찰차만 봐도 울화통이 치밀어 감정 제어가 안됐다. 경찰과 싸우려 들어 친구들이 여러번 말리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명군의 가족은 경찰에 받은 6400만원은 30년간 가족이 겪은 고통을 위로해주지 못한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경황이 없어 경찰이 하자는 대로만 했다”는 명씨는 “변호사를 통해 이제라도 따로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한지 알아볼 생각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 가능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명씨는 동생이 억울한 피해자였음을 인정받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춘재가 자신이 진짜 범인이라고 자백한 뒤에도 경찰로부터 사과는커녕 연락 한번 받지 못했다”며 “지금이라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고문 가해자로 지목돼 실형을 살았던 전직 경찰관은 서울신문에 “명군이 달아나려고 해 다른 형사가 밀었는데 이때 넘어지며 머리를 다친 게 직접적 사망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춘재를 수사 중인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당시 (명군이) 범인이 아니라고 판명 났기 때문에 지금 수사본부는 관련 자료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면서 “(이춘재가 자백했다고 해서) 가족을 찾아갈 이유가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박세원 기자 o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