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연기를 시작한 지 딱 20년이 됐어요. 긴 시간 여러 작품을 거치며 저도 모르게 쌓여온 냉소나 회의 같은 것들을 말끔히 치유해준 작품이에요. 저도 시청자처럼 희망을 봤어요.”
두 달 간 시청자의 마음속 동백으로 자리매김했던 공효진은 ‘동백꽃 필 무렵’(KBS2·이하 동백꽃)을 ‘희망’이라고 했다. 드라마 종영을 맞아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각박한 세상 속 모두가 센 척해도 결국 뜨뜻한 사람의 온기에 무너진다는 걸 알았다”며 “마음속 벽이 하나 허물어진 기분”이라고 했다.
공효진의 말처럼 동백꽃이 안방에 전한 위로라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작은 어촌 공동체 옹산을 배경으로 한 극은 비단 싱글맘 동백(공효진)과 열혈 청년 용식(강하늘)의 담백한 로맨스에만 머물지 않았다. 연쇄살인범 ‘까불이’가 만드는 서스펜스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었지만, 최고는 역시 사회의 은유였던 옹산 마을 사람들을 통해 풀어낸 짙은 휴머니즘이었다.
극은 입소문을 타면서 시청률 기록을 계속 갈아치우더니 끝내는 23.8%(닐슨코리아)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끝맺었다. 공효진 역시 동백꽃이 여타 작품과는 다르다고 느꼈다. 시민들의 반응이 특히 그랬다. 마지막 촬영 후, 아름다운 시퀀스를 자랑하는 드라마의 주 촬영지였던 포항의 단골 음식점들은 작은 거라도 챙겨 올라가라며 김치와 과메기 등 먹을거리를 한 아름 싸줬다.
촬영 현장을 지켜보던 시민들의 입에서는 “예뻐요” “최고예요” 같은 말 대신 “까불이한테 지지 마세요” “힘내세요”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공효진은 “극 종영 후 ‘잘 가요’라는 메시지를 정말 많이 받았다”며 “시청자도 이별하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이 모두의 마음 한편에 깊숙이 자리 잡았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찡했다”고 떠올렸다.
걸출한 연기를 자랑하는 공효진은 처연하면서도 굳센 동백을 깔끔히 소화해냈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은 작품이었다. 극으로 치닫는 감정이 많았던 탓이다. 드라마 후반부엔 작가 임상춘이 공효진에게 “계속 울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할 정도”였다. 계속 눈물을 흘리느라 피부도 상하고 목도 컨디션을 유지하기가 버거웠지만, 시청자들의 응원이 큰 힘이 돼 견뎌낼 수 있었다.
배우들 사이의 끈끈한 호흡도 극을 끌어간 원동력 중 하나였다. “몸이 떨리는 경험”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강하늘 오정세 염혜란 이정은 고두심 등 모든 배우가 최상의 합을 자랑했는데, 이는 동백꽃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했다. 공효진은 “내가 소박하게 연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정세 오빠와 하늘씨는 화려하고 아름답게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라며 “그런 합이 시너지를 내면서 합주가 자아내는 묘미를 만든 것 같다”고 했다.
사실 동백꽃에서 빛났던 부분들이 한두 가지는 아니다. 차영훈 PD의 군더더기 없는 연출도 흥행의 끌차가 된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최고는 역시 작가 임상춘의 극본일 테다. ‘말맛’이 대단해 연기경력이 반세기에 가까운 배우 고두심이 “대사가 어떻게 이럴까”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공효진은 “작가님의 탁월한 필력을 보여주는 부분 중 하나가 시제를 섞어서 표현하는 부분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늘 차고 넘쳐서 ‘아까워 죽겠다’면서 줄이는 데 애를 쓰셨다”고 전했다. 이야기꾼으로 남고 싶어 필명 외에는 알리지 않는다는 임상춘에 대해서도 짤막한 이야기를 남겼다.
“작가님은 동백이 같은 분이에요. 말투나 목소리 크기도 딱 동백이를 닮았어요.”
임상춘의 필력이 가장 두드러졌던 부분 중 하나는 휴머니즘의 정수를 부모와 자식 관계를 통해 풀어낸 지점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끝없는 ‘내리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극은 부모 자식 사이인 정숙(이정은)-동백, 덕순(고두심)-용식, 은실(전국향)-규태(오정세), 화자(황영희)-제시카(지이수) 등을 중심으로 사회의 올바른 모습을 탐구했다. 동백 등 모든 이들이 자신의 정체감을 탄탄히 다지는 지반이기도 한 부모의 헌신은 사랑이란 이름의 “작은 영웅”을 모두의 마음속에 심어놓는다.
특히 동백의 아들 필구(김강훈)는 엄마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는데, 이 둘의 끈끈한 관계가 큰 감동을 안겼다. 공효진은 그 공을 아역 배우 김강훈에게 돌렸다. 그는 “감독님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유연하게 연기를 할 줄 아는 아이였다”며 “오디션 영상을 본 적이 있었는데, 강훈이가 하는 대사에만 유독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부분 중 하나가 공효진이 작품을 고르는 선구안이다. 최근만 일별하더라도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와 동백꽃으로 연타석 홈런을 쳤다. “유치하지 않고 깊이 있는 이야기들을 고르는 데 신경을 쏟는다”는 게 그의 설명인데, 무엇보다 “작품 살림살이도 잘 챙길 줄 아는 배우가 되고 싶어” 제작진과 많은 의견을 주고받으며 양질의 얼개를 잡아나간다고 한다.
먼저 캐스팅된 공효진이 향미 역에 손담비를 추천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다. 손담비와 평소 절친한 사이인 공효진은 “대본을 읽으면서 담비씨가 생각이 많이 났다”며 “동백과 상반된 세련된 외양의 향미가 있다면 재밌는 장면이 연출될 것 같았다”고 했다. 또 “담비씨가 원래 리액션(반응)이 약한 편인데, 그런 모습이 향미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며 “향미와 노규태(오정세)의 오리배 장면은 정말 잘했다 싶었다. 담비씨가 칭찬받을 때 기분이 더 좋더라”고 했다.
인터뷰 말미 공효진은 연기 인생 20년을 돌아보며 별안간 ‘만두’를 떠올렸다. 동백꽃 동백과 용식의 데이트에서 늘 빠지지 않던 단골 음식 만두 말이다. 공효진은 “스페셜 방송에 동백이랑 용식이가 왕만두를 빚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만두를 빚는 것도 대업이다. 행복이란 저마다의 왕만두를 빚는 일’이라는 말을 한다”며 “나의 지난 20년도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마다의 재료로 속을 꽉꽉 채운 만두는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사람과 닮은 점이 있었다.
“동백꽃으로 정말 큰 에너지를 얻었어요. 앞으로도 이런 희망적 드라마가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저도 계속 이런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어요. 시청자분들께도 한 번 더 음미하고픈 작품이 됐으면 좋겠어요.”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