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원 선거날인 24일, 홍콩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시위가 6개월째 접어드는 와중에 시위의 상징인 복면이 등장하지 않은 건 시위자들이 이날을 ‘선거만 하는 날’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시위대가 사용하는 텔레그램 등 온라인 메신저에서 24일 마스크나 검은 옷을 착용하지 말자는 공지가 오갔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투표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거나 시위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의 검은색 옷을 입을 경우 표가 누락되거나 조작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시위대는 이날 시위에 나서는 대신 투표소에 갔고, 지지하는 의원들의 거리 홍보에 동참하고 시민들의 선거를 독려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선거 당일 길거리에서 범민주 진영 후보자의 홍보 전단을 나눠주던 찬(58)은 “지난 6월부터 매주 주말마다 시위에 참석했지만 오늘은 범민주 진영 후보자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기 위해 참가하지 않았다”고 SCMP에 말했다. 그는 “정부는 시위의 정당성을 묵살했지만, 투표를 통해 우리가 정당하다고 보여줄 수 있다. 그들은 우리를 그냥 무시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간 시위대가 활동을 논의해온 온라인 메신저도 24일엔 조용했다. 시위에 자주 동참하는 한 프리랜서 여행 가이드는 “이날만큼은 더 큰 시위를 도모하자는 움직임이나 제안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위자들은 최근 며칠간 주변 사람들과 길거리 시민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며 “그래서 시위대가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움직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고 전했다.
이 가이드는 “시위대는 그간 홍콩에서 일어난 극심한 상황들을 받아들이려 아직까지 애쓰고 있고 그다음 걸음을 어떻게 내디딜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이들은 육체적으로도 지쳐있다”고 말했다. 이어 “시위자들이 현재 시점에서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 보이지만 시위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고 덧붙였다. “선거 결과가 나온 뒤 향후 계획이 명확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홍콩대학교 학생인 케빈(21)은 이날 선거를 마치고 SCMP에 “범민주 진영의 득표율이 높아질수록 우리가 계속 싸울 수 있는 정당성이 부여될 것”이라면서도 “정부가 우리의 5가지 요구 사항에 답하는 게 우리(시위대)가 승리하는 유일한 결과”라고 말했다. 시위대에 선거가 중요하긴 해도 해결책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시위대는 △송환법 공식 철회 △경찰 강경 진압에 대한 독립 조사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된 시위대의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 총 5가지 사항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홍콩 시위를 지지하면서도 무효표를 행사한 시민들도 있었다. 다니엘(29)은 “시위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이 범민주 진영을 위해 투표해야 하는 건 아니다”고 SCMP에 말했다. 그는 “시위 지지자이지만 범민주 진영의 최근 몇 년간 활동에 만족하지 못해 무효표를 행사하는 사람들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게 민주주의의 핵심이다”고 덧붙였다.
시위 지지와 관계없이 자신의 삶이 정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24일 선거 현장에서 호(40)는 “지하철은 매일같이 일찍 문을 닫고 있고 우리 가족은 주말을 집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시위가 차즘 잦아들고 홍콩의 국제적인 이미지가 다시 좋아지길 희망한다”고 SCMP에 말했다.
홍콩 범민주 진영은 구의원 선거에서 전체 452석 가운데 25일 오후 12시(현지시각) 현재 개표 결과 무려 385석(85.2%)을 차지했다. 친중파 진영은 58석(12.8%)에 그쳤으며, 중도파가 8석을 차지했다. 나머지 1석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박세원 기자 o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