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셀프다”…한국 장르문학의 새로운 경지

입력 2019-11-21 15:25
저 사진 속 남성처럼 소설 '인 더 백'의 주인공은 배낭을 걸머지고 남쪽을 향해 걷고, 또 걷는다. 야만의 세계에서 아들을 살리기 위한 남성의 투쟁은 독자에게 서늘하면서도 뭉근한 감동을 선사한다. 요다 제공

2014년 가을이었다. 소설가 차무진(45)은 추석 연휴를 맞아 고향인 대구에 내려갔다. 당시 일곱 살이던 아들은 심심하다고 투정을 부렸는데 무료해하는 아이를 달랠 방법이 마땅찮았다. 결국 두 사람은 대구 앞산에 있는 ‘공룡공원’에 가기로 했다. 숲속으로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은 그만 숲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우두망찰 서서 공원이 있는 쪽을 가늠해보았지만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차무진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만약 세계가 망하고 나와 이 녀석만 남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아들을 끝까지 보호할 수 있을까. 혹시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 덕분에 나도 생존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리고 5년이 흘러 그가 품었던 상상은 소설이 되었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미해진 세상에서 배낭에 아들을 담고 안전지대로 향하는 이야기, 바로 ‘인 더 백(In the bag)’이다. 지독할 정도로 끔찍하고 가없이 아름다운 이 작품은 한국 장르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구원은 셀프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동민은 글을 쓰려고 회사를 때려치운 한 집안의 가장이다. 배관공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생활고에 시달렸고 작품은 기대만큼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백두산 화산이 폭발하면서 세상은 난장판이 되고 만다. (한국 정부군의 일방적인 주장에 따르면) 북한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돼버렸고, 북한 주민들은 살아남으려고 국경을 넘어온다. 북한 정권 입장에서는 이런 꼴을 지켜볼 수 없으니 남쪽을 향해 식인 바이러스가 탑재된 미사일을 쏟아붓는다. 창졸간에 한반도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식인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뒤섞인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동민으로서는 가족을 살리는 게 최우선이다. 살아남으려면 청정 지역인 대구로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동호대교를 건널 때 폭격으로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외롭고도 처절한 싸움을 혼자 감당하게 된다. 여섯 살배기 아들이 담긴 배낭을 걸머지고 대구로 향한다. 곳곳에서 아이를 노리는 식인자가 출몰한다. 정부군은 그를 바이러스에 감염된 ‘빨갱이’로 넘겨짚고선 죽이려고 달려든다. 동민과 그의 아들은 수차례 생사의 문턱을 넘나든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천지간에 동민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구원은 셀프”인 세상에서 아이를 살리겠다는 집념 하나만이 그가 거머쥔 가느다란 희망의 끈이다. “아빠가 말이야. 엄마한테 그렇게 말했거든. 너를 검은 비가 내리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빛이 드는 곳을 보여주겠다고.” 과연 동민과 그의 아들은 무사히 대구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의 결말은 독자가 기대하는 해피엔딩일까.

소설 '인 더 백'에 담긴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일러스트. 요다 제공

소설의 챕터는 동민의 동선을 따라 구분돼 있다. 잠실 구리 여주 충주 문경 낙동강…. 섬뜩하고 처절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흡인력이 보통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요즘 재미있는 소설이 있냐고 묻거든 이 책을 추천하면 된다. 끔찍하고 잔인한 이야기를 껄끄럽게 여기는 독자가 아니라면 십중팔구 열광할 게 분명하다. 이야기의 속도를 최고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인지 작품엔 그 흔한 접속사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브레이크는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액셀러레이터만 밟으면서 전진하는 소설이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우선 재앙 이후 아버지와 아들의 여정을 담았다는 점에선 포스트 아포칼립스(멸망 이후의 삶을 다루는 장르) 분야에서 정전의 반열에 오른 코맥 매카시의 ‘로드’와 비슷하다. 식인을 소재로 다뤘다는 점에선 루쉰의 ‘광인일기’를, 무자비한 빨갱이 색출 작전을 그린 대목에선 이청준의 ‘소문의 벽’ 같은 작품을 떠올리기 쉽다. 그렇다고 인 더 백을 몇몇 작품의 아이디어를 짜깁기한 소설로 깎아내리긴 힘들 듯하다. 작가가 작품 곳곳에서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그럴듯하게 변주해내고 있어서다.

귀띔하자면 소설의 결말엔 거대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소설깨나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예상하기 힘든 내용이다. 줄기차게 직구만 던지던 투수가 갑자기 낙차가 큰 포크볼을 선보인다고나 할까. 이 지점에 다다르면 많은 독자는 이전까지 펼쳐진 장구한 이야기에서 투박하게 느껴진 부분들을 되새겨보게 될 것이다. 짜릿하면서도 아릿한 재미를 느끼면서 말이다.

21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소설가 차무진. 그는 신작 '인 더 백'을 쓰면서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최종학 선임기자

“이번 작품 점수는 72점”

차무진은 2010년 장편 ‘김유신의 머리일까?’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10년차 소설가다. 전작으로는 ‘해인’(2017) ‘모크샤, 혹은 아이를 배신한 어미 이야기’(2018) 등이 있다. 작가의 삶을 살기 전에는 게임회사에서 개발팀장으로 일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동민의 삶과 포개지는 부분이 적지 않은 셈이다. 21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차무진의 작업실을 찾아갔을 때 그는 “전업 작가가 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내년이면 작가 활동을 한 지 10년이 돼요. 사회인으로서 많은 걸 내려놓은 시간이었죠. 하지만 ‘서사’를 만드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느낀 세월이기도 했어요. 작가가 된 것을 후회하진 않아요. 만약 직장인으로 살았다면 지금쯤 꿈이 없는 중년의 남자가 됐을 테니까요.”

인 더 백은 ‘이야기’가 전부인 소설이 아니다. 투박하고 거친 질감의 문장은 작품의 처연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끌차 역할을 한다. 얼마간 낯설게 여겨지는 어휘를 적재적소에 가미한 부분도 많다. 이런 지점을 마주하면 작가가 얼마나 문장에 공을 들이는지 짐작하게 된다.

실제로 차무진은 “사전 읽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알맞은 어휘를 사용해 좋은 문장을 만드는 일이 작품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때문”이라며 “꾸준히 수준 높은 장르문학을 선보이고 싶은 게 꿈이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차무진은 인 더 백을 어떻게 자평하고 있을까. 그는 “100점 만점에 72점 정도는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이 작품은 제가 60대가 되고 그만큼 경륜이 쌓였을 때 쓰고 싶은 소설이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이가 들기 전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유는 아이 때문이었어요. 아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 써야 아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소설에 녹여낼 수 있겠더라고요. 72점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것도 제겐 과분한 점수예요.”

차무진은 차기작에서 어떤 이야기를 선보일지 아직 정해놓지 않았다. 구상 중인 작품 중 하나는 정육(精肉)을 하는 조선 시대 양반 이야기다. 만약 이 이야기가 소설이 된다면 그는 또 얼마나 기가 막힌 스토리를 만들어낼까. 차무진은 “너무 쓰고 싶은 작품인데 취재를 꼼꼼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