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미로 인생 2막 시작” 손담비가 전한 동백꽃·임상춘·캐스팅 비화(종합)

입력 2019-11-22 08:00
배우 손담비. 키이스트 제공


“그런데 사람들은요. 맨날 나보고 가던 길 가래요. 다들 난 열외라고 생각하나 봐.”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KBS2·이하 동백꽃)에서 동백(공효진)이 끝내 피어나는 꽃이었다면 향미(손담비)는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물망초였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요”. 사람들의 무시와 핍박 속 코펜하겐이란 작은 꿈을 꿨던 향미는 소외된 모든 서민의 은유였다. 그래서였을까. 향미가 살인범 ‘까불이’에게 허무하게 죽어버리자 온라인에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글이 줄을 이었다.

술집 ‘물망초’ 마담의 딸이자 가족들에게 버려졌던 이 아이는 극에선 끝끝내 꽃피우지 못했다. 현실에서는 달랐다. 극 종영을 맞아 20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손담비(36)는 “인생의 ‘꽃길’과 같은 작품을 만났다”며 환하게 웃었다. “염색을 하면서 (노란 머리) 향미를 떠나보내려 했는데, 여운이 너무 짙다”는 그의 말처럼 머리카락은 다시 검어졌지만, 말투에선 여전히 향미가 조금씩 묻어났다.


배우 손담비. 키이스트 제공


사실 동백꽃은 시골 옹산을 배경으로 한 싱글맘 동백과 청년 용식(강하늘)의 로맨스물이다. 그러나 주인공 못지않게 많은 시청자가 동백의 술집 까멜리아 ‘알바’였던 향미에게 열광했다. 시청률 20%(닐슨코리아)라는 놀라운 기록이 섬뜩하면서도 때로는 측은했던 향미의 다면적인 모습 덕분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다. 매회가 끝나면 온라인에는 ‘향미 까불이 설’ 등 숱한 네티즌의 추측 글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향미 속엔 손담비의 노력이 겹겹이 배어있었다. 가수 시절부터 ‘연습벌레’로 불리는 자타공인 노력파였던 손담비의 열정은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뿌리 염색’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지난 6월 촬영 시작 후 일부러 염색하지 않았는데, “촬영 막바지엔 검은 머리카락이 정수리를 덮을 정도”였다. 매니큐어를 칠하지 않았고 옷은 촌스러운 것으로만 골라 입었다. 가난한 향미의 처지를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손담비는 “제대로 보여드리고 싶었다. 망가질 거면 어설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팬 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렇다면 그가 “많은 배우가 하고파 했고, 경쟁이 치열했던” 향미 역에 캐스팅된 비화는 무엇일까. 손담비는 “차영훈 감독님이 당신을 보면서도 왠지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은 제 느낌이 향미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시더라”며 “말도 평소와 달리 최대한 느릿느릿하게 하는 데 신경을 썼다”고 전했다. 온 힘을 쏟아부었던 손담비는 향미가 죽은 후 작가 임상춘이 보낸 “정말 어려웠던 캐릭터인데, 잘 소화해줘서 고맙다”는 장문의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큰 뿌듯함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시청자의 댓글이 하나하나 힘이 됐다. 배우 정려원 공효진 김소이 등 평소 절친한 친구들의 응원에서도 많은 에너지를 받았는데, 특히 공효진과 정려원은 ‘현실 속 동백이’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도움을 줬다. 정려원과 대사를 맞추며 극 초반 향미 캐릭터를 다듬었고, 현장에선 공효진의 조언을 들으면서 중심을 잡아나갔다.


배우 손담비. 키이스트 제공


잘 알려졌듯 2008년 곡 ‘미쳤어’로 신드롬을 일으켰던 손담비는 연기자의 꿈을 품고 1년 후 ‘드림’(SBS)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큰 열정을 갖고 시작”했지만, 향미처럼 편견에 옥죄일 때도 더러 있었다. 그는 “초반엔 섹시한 콘셉트의 배역들이 많이 들어오더라. 과감히 그런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럴수록 철부지 딸이나 경찰 역할 같은 연기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캐릭터를 찾으려고 더 노력했다”고 떠올렸다.

3년 반의 드라마 공백기 끝에 찾아온 동백꽃은 그런 치열했던 손담비의 연기 인생 10년을 축하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삶을 격려하는 꽃다발이었던 셈이다. 실제 이번 작품을 계기로 제안 들어오는 작품들의 장르도 다양해지고 있는데, 시청자에게 좋은 보답이 될 수 있는 작품을 고심 중이라고 한다. 손담비는 동백꽃을 “배우 손담비를 각인한 작품이자 인생 제2막을 열어준 드라마”라고 정의했다.

“가수 할 때도 음반이 잘 안 되고 힘들어하던 때 ‘미쳤어’라는 노래를 만났어요. 동백꽃도 그런 작품인 것 같아요. 훗날엔 엄정화 선배님처럼 연기와 노래를 둘 다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제 시작이죠.”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