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 홍콩 지지글 훼손 더 못 참아… 학생들 고발 나서

입력 2019-11-18 16:20 수정 2019-11-18 16:26
훼손된 서울대 레넌 벽. 오른 편의 전지가 형체도 없이 찢겼다. 연합뉴스

최근 국내 대학가에 홍콩 시위 지지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중국인 유학생들과 충돌이 반복되고 있다. 대자보나 현수막 훼손 사례에 이어 한·중 학생들간 대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한국 대학생들은 중국인 유학생들의 방해가 조직적이고 지속적이라고 보고 법적 대응에 나섰다.

서울대 ‘홍콩의 진실을 알리는 학생모임’은 지난 6일 중앙도서관 건물 한 벽면에 마련한 ‘레넌 벽’ 일부가 훼손됐다고 18일 밝혔다. 이 레넌 벽은 홍콩 시위 응원 문구를 적은 포스트잇을 부착할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지만, 누군가 포스트잇을 붙이는 전지를 찢어버렸다. 서울대 학생모임은 “일부가 찢어진 상태인 것으로 보아 바람에 날아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면서 “19일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레넌 벽(Lennon Wall)은 1980년대 체코 공산정권 시기 반정부 시위대가 수도 프라하의 벽에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의 노래 가사와 구호 등을 적어 저항의 상징으로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 시위가 본격화된 이후 홍콩에서는 송환법 반대 메시지를 담은 레넌 벽들이 설치됐으며, 최근 국내 대학가에서도 홍콩 시위 지지 의사를 표현하는 레넌 벽 설치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 15일 전남대 학생모임 ‘벽보를 지켰던 시민들’이 인문대 골목 담벼락에 설치한 레넌 벽은 첫날부터 수난을 겪었다. 당일 오후 20∼30여명의 중국 유학생들이 몰려와 철거를 요구했다. 대자보에 침을 뱉기도 했다. 학생모임은 중국인유학생회와도 대화를 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그날 밤 레넌 벽에 붙어있던 대자보와 현수막 등이 누군가에 의해 철거됐다. 대신 “입 닥쳐” “당신들이 우리 중국 홍콩 사람이 아니잖아! 함부로 말하지 마” 등의 메모가 나붙었다. 전남대 학생모임은 시설물 훼손 등과 관련해 광주북부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했다.

전남대 레넌 벽에 홍콩 시위를 비하하는 의견들이 적혀 있다.'벽보를 지켰던 시민들' 제공

한양대, 한국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에서도 중국인 유학생들과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한국인 대학생들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3일 한양대에서는 중국인 유학생 50여명과 한국인 학생 10여명이 대치하는 일이 발생했다. 한양대 인문과학관 1층에 게시된 레넌 벽에 ‘하나의 중국, 분할은 용납하지 않는다’ ‘홍콩 독립 절대 반대’ 등의 문구를 붙이는 중국인 유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한국인 학생 10여명이 부딪힌 것이다. 대치는 서로 욕설을 주고받는 수준까지 고조되며 저녁까지 이어졌다. 한국인 학생들은 또다시 대자보 훼손 사태가 발생하면 형사 대응까지 고려하겠다고 경고했다.

한양대 인문과학관 1층에 마련된 레넌 벽의 모습. 연합

지난 13일 한국외대에서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위챗(중국판 카카오톡) 단체대화방 등을 통해 학내 대자보 게시 장소를 공유하며 조직적 훼손 행위를 논의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한국 외대 재학생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 등에 제보된 내용에 따르면, 중국인 유학생들은 “찢으면 된다” “밤길 조심하라고 문자하자” 등의 대화를 서로 주고받았다. 홍콩 지지 대자보에 적힌 게시자 연락처로 “홍콩은 중국 땅”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인증을 하기도 했다. 한국외대에서는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학생들에 대해 ‘정신병’ ‘기생충’ 등 표현을 쓰며 비난하는 게시물이 붙었다가 철거되기도 했다.

연세대와 고려대에서도 중국인 유학생들이 홍콩 시위 관련 시설물들을 훼손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연세대에서는 지난달 말부터 학생들이 두 차례 캠퍼스 4곳에 내건 홍콩 시위 지지 현수막들이 무단 철거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학생들은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커터칼로 현수막을 끊어 가져갔다는 목격담을 바탕으로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고려대 정경대 후문 게시판에 붙은 홍콩 시위 지지 대자보 역시 3차례나 훼손됐다.

전문가들은 대학가에서 잇따르는 대자보 훼손 행위는 분명 잘못됐지만 이와 관련된 논란이 중국에 대한 감정적 반발로 이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중국인들은 홍콩 문제를 식민주의 청산이자 일국양제의 문제로 생각한다”면서 “양국 학생 모두 상호 이해에 기초한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실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