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쿠데타”…‘모랄레스 퇴진’ 번질까 진화 나선 중남미 좌파

입력 2019-11-12 16:34 수정 2019-11-12 16:36
개표 조작 의혹으로 물러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전 대통령이 사퇴한 지 이튿날인 11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근황을 전했다. 코차밤바로 피신한 그는 은신처에서 바닥에 담요를 깔고 천막을 친 뒤 누워 있는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그는 “쿠데타 탓에 강제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첫날 밤을 이렇게 지냈다”며 “지도자였던 때를 회상했다”고 밝혔다. AP 연합뉴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개표 조작’ 의혹에 휘말려 불명예스러운 자진 사퇴를 발표한 이후 중남미 좌파 정권들은 퇴진 여파가 자국에까지 영향을 미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AP통신 등은 11일(현지시간) 쿠바, 멕시코,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등 중남미 좌파 정권들은 모랄레스 대통령이 불법적 방식으로 권좌에서 물러났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신은 군부 쿠데타의 희생양일 뿐이라는 모랄레스 대통령의 주장에 동조한 것이다. 볼리비아 군부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공작을 벌였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지만, 지난달말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승리한 중도좌파 성향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당선인조차 이 같은 분석에 동참했다. 중남미 좌파 지도자들이 ‘모랄레스 퇴진’을 진영 전체의 위기로 받아들이며 적극적 연대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대선에서 89년 만에 중도좌파 정부가 들어선 멕시코는 전날 앞장서 모랄레스 대통령에게 망명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마르셀로 에브라르드 외교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모랄레스 대통령이 몇분전 전화를 걸어 정치적 망명을 공식 요청했다”며 “그가 볼리비아에서 처한 위험을 고려해 망명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모랄레스 퇴진 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입장은 이들이 왜 연대하는지를 짐작케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랄레스의 퇴진을 “서반구 지역 민주주의의 의미있는 순간”으로 평가하며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를 콕 집어 경고장을 날렸다. 그는 “볼리비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이들에게 ‘민주주의와 국민의 뜻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고 강조했다.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 등 중남미 우파진영의 정권들도 “민심의 저항에 따른 자발적 퇴진”이라고 주장하며 트럼프 행정부와 유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중남미 좌파 진영은 이에 맞서 ‘쿠데타’라는 용어를 적극 부각시키고 있다. 중남미는 지난 20세기 미국의 정치 개입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지역이다. 미국은 과거 반미 성향이 강한 중남미 좌파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이들이 정권을 잡을 경우 정보당국을 동원해 군부 쿠데타를 지원하는 등 중남미 정치에 적극 개입해왔다. 결국 쿠데타로 모랄레스가 축출됐다는 중남미 좌파 진영의 공통적 입장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환기해 중남미 우파정권과 미국을 한통속으로 묶고 진영 결집을 유도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에 대해 “모랄레스 퇴진 이후 남은 질문은 이것이 민주적 의지에 따른 것이었는지 쿠데타였는지 여부”라며 “민주주의가 회복된 것인지 아니면 무너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볼리비아와 중남미에 확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볼리비아 군부의 모랄레스 대통령에 대한 구두 퇴진 요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의 핵심 쟁점이 되고 있다. 대선 개표 조작 의혹에 분노한 야권과 시민들의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모랄레스 퇴진을 촉발한 것은 사실이나 재선거 실시를 운운하며 버티던 모랄레스 대통령에게 최후의 한 방을 날린 것은 군 최고사령탑의 퇴진 요구였다. 존 폴가 헤시모비치 미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볼리비아 군은 무력을 쓰지 않고 구두로 하야를 요구했다”며 “이를 위협으로 본다면 쿠데타고, 위협이 아닌 단순 권고로 본다면 쿠데타가 아닐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