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 볼리비아 대통령 사퇴… 중남미 좌파정권 ‘비상’

입력 2019-11-11 16:41
사퇴를 발표하는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EPA연합뉴스

한때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회주의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부정 선거 논란 끝에 사퇴했다. 2006년 볼리비아 첫 원주민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14년 만이다. 하지만 중남미 좌파 지도자들은 모랄레스 대통령의 퇴진을 ‘쿠데타’로 규탄하며 연대에 나섰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10일(현지시간) 오후 TV연설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이런 갈등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 가슴 아프다”면서 의회에 사의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토착민이라는 점이 나의 원죄”라며 억울함을 주장했지만 이번 사태는 그의 권력욕이 빚은 결과다.

그는 지난 2016년 4선 연임을 위한 개헌을 시도했다가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개헌 대신 헌법소원을 통해 4선 도전을 강행했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한 규정이 위헌이라도 판단했다. 그리고 지난달 20일 치러진 대선에서 모랄레스 대통령은 40%를 득표, 야권 후보를 10%포인트 앞서면서 결선투표 없이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개표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른 정황이 잇따라 나오면서 퇴진 촉구 시위가 잇따랐다.

특히 대선 과정을 감사한 미주기구(OAS)가 이날 “투·개표에서 다수의 부정과 조작이 발견됐다”고 발표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OAS는 “모랄레스 대통령이 10%포인트 이상의 격차로 승리하는 것이 통계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면서 “선거 결과를 무효로 하고 새 선거 절차를 시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OAS의 발표 직후 “헌법상 역할을 다해야 한다”며 대통령직을 유지한 채 재선거를 치르는 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경찰에 이어 군까지 사퇴를 요구하자 입장을 바꿔 사임을 결정했다.

그는 중남미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볼리비아 산간지역의 아이마라족 원주민 출신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목동, 벽돌공장 노동자, 빵 장수 등 허드렛일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이후 코카콜라와 코카인의 원료인 코카 재배를 시작한 후 코카 재배농 이익단체를 이끌며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1997년 좌파 사회주의 운동에 몸을 담으며 의회에 입성했다.

2002년 대선에서 그는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 전 대통령에 석패하긴 했지만 야권의 핵심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곤살로 대통령이 중도 사퇴하고 임기를 이어받은 카를로스 메사 전 대통령도 퇴진한 후 2005년 대선에서 53.7%의 득표율을 얻으며 당선됐다. 대통령 취임 이후 그는 천연가스 시설의 국유화 등 좌파 정책을 통해 볼리비아의 빈곤 해소에 나섰다. 4년 후인 2009년 대선에서는 64.2%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연임에 성공했다. 2013년에도 61.4%의 지지율을 얻었다.

2000년대 초중반 1000달러 채 되지 못하던 볼리비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그의 집권 이후 급상승해 2014년엔 3000달러 수준으로 올라갔다. 덕분에 중남미에서 ‘핑크 타이드’(Pink Tide·온건한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 물결)가 점차 퇴조하는 와중에도 그의 지지기반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가스 수출에 의존하던 볼리비아 경제가 악화된 상황에서 그를 둘러싼 부패 혐의가 불거지면서 지지율도 떨어졌다. 그가 29층짜리 대통령궁을 새로 짓고 자신의 생가에 박물관을 세운 것은 여론을 한층 악화시켰다. 결국 부정 선거를 통한 정권 연장을 꿈꿨다가 대통령궁에서 쫓겨나게 됐다. 그의 사퇴로 3주간 격화됐던 볼리비아 시위는 다소 잠잠해질 전망이다. 하지만 모랄레스 정권의 각료들이 줄사퇴 하거나 멕시코로 망명하면서 볼리비아는 한동안 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의 불명예 퇴진으로 중남미 좌파 지도자들에게도 초비상이 걸렸다. 최근 중남미 각국에서 대통령 사임까지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볼리비아 대통령의 사임이 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되기 때문이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선 당선자, 부패 혐의로 복역하다 석방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 등은 모랄레스 대통령에 대한 연대를 표시하면서 볼리비아 반정부 시위대를 “폭력적인 쿠데타”라고 규탄하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멕시코 정부는 모랄레스 대통령과 각료들에게 피난처 제공을 약속하고 나섰다.

이에 비해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 등 우파 정부는 모랄레스 사임을 환영하면서 볼리비아의 민주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특히 브라질은 볼리비아 정국 혼란과 관련해 이날 OAS의 감시 하에 신속하고 투명한 선거를 치러야 한다며 OAS 긴급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