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불복’ 시위가 격화되고 있는 볼리비아에서 대통령궁 경호부대를 비롯한 몇몇 대도시 경찰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며 시위에 가담했다. 지난달 개표 조작 의혹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에 일부 공권력까지 동조한 상황에서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영국 가디언, AP통신 등은 9일(현지시간) 볼리비아의 행정수도 라파스 등 최소 6개 도시에서 경찰들이 모랄레스 대통령 퇴진 촉구 시위에 동참했다고 보도했다. 경찰들은 전날부터 근무지를 이탈한 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제복을 입고 시내 주요 도로를 행진하는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라파스에서 대통령궁을 지키던 경찰 수십명은 시위 참여 이후에도 대통령궁으로 복귀하지 않고 지역 경찰본부로 향했다.
코차밤바의 경찰들은 사복을 입은 채 경찰서 옥상에 올라가 “경찰을 정부의 정치적 도구로 삼지 말라”며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사법수도인 수크레, 반정부 시위의 중심지인 산타크루스에서도 경찰들이 “코차밤바 경찰이 시작한 항명에 합류하겠다”고 선언했다.
볼리비아군 수뇌부에 따르면 군 최고사령탑인 윌리엄스 칼리만은 이날 “볼리비아 헌법은 군이 자국 시민들과의 대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하비에르 사발레타 국방장관도 “현재로서는 시위에 가담한 경찰들에 대해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며 “거리로 나선 수만 명의 볼리비아 시위대에 대해서도 군 병력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군·경 치안당국에서 국가 원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가능성을 드러낸 셈이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TV연설을 통해 “야권과 폭력단체가 주도하는 쿠데타 음모”라며 시위를 폄하하면서도 야권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통령의 제안에도 시위대의 분노는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AFP통신은 시위대가 볼리비아 국영 방송사인 ‘볼리비아TV’와 라디오인 ‘파트리아 누에바’ 사무실을 점거하고 방송 송출을 중단시켰다고 전했다. 국영방송이 대통령의 입장만 대변한다는 이유였다. 직원들이 내쫓긴 이들 방송국에서는 현재 음악만 송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반정부 시위는 지난달 20일 치러진 볼리비아 대선에서 개표 조작 의혹이 불거지면서 촉발됐다. 대선 1차 투표 개표를 84% 완료한 상태에서 모랄레스 대통령과 야당 후보인 카를로스 메사 전 대통령 사이 격차가 크지 않아 2차 투표가 유력한 상황이었으나, 볼리비아 선거관리위원회는 돌연 개표 과정 공개를 중단했다. 하루 뒤 96% 개표가 완료된 시점의 결과가 다시 공개됐을 때 두 후보의 격차는 10% 이상으로 벌어져 있었고 모랄레스 대통령은 4선 연임에 성공했다.
석연치 않은 개표 과정에 볼리비아 전역에서 시위가 이어졌지만 선관위는 지난달 25일 모랄레스의 당선을 공식 선언했다. 야권을 중심으로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서면서 반정부 시위가 2주 넘게 진행되고 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