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 첫 ‘바깥(외지) 물질’ 나섰던 그 곳에 해녀상 들어섰다

입력 2019-11-10 15:01 수정 2019-11-10 15:12
부산시 영도구 해녀문화전시관에 설치된 제주해녀상. 제주도는 지난 6일 영도해녀문화전시관 개관에 맞춰 같은 날 해녀상 제막식을 갖고 제주해녀 홍보 행사를 진행했다. 제주도 제공

제주도가 개발한 제주해녀상 표준모델(측면). 부산 영도해녀문화전시관에 설치된 제주해녀상은 이 표준을 따라 제작됐다.

19세기 말, 제주 해녀들은 원정 물질에 나선다. 일본 어민들이 제주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어장이 황폐해졌고, 우리나라 공업화 과정에서 우뭇가사리의 가치가 커지면서 한반도 남해안에서 제주 해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우뭇가사리는 양갱 젤리 크림을 비롯해 견직물의 풀, 천의 방수, 인쇄에 이르기까지 산업계 전반에 쓰였다. 이 같은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제주 해녀들이 첫 바깥물질에 나섰던 곳, 그 출발점인 부산시 영도구에 제주해녀상이 들어섰다. 제주해녀들이 부산 앞바다에 몸을 띄운 것이1895년, 124년만이다.

제주도는 최근 부산시 영도구청이 개관한 영도해녀문화전시관에 전통 제주해녀상을 설치하고 제막식을 개최했다고 10일 밝혔다. 제주여성들이 처음 바깥물질에 나섰던 부산 영도의 의미를 기리고, 제주 출향해녀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서다.

부산 시민들과 만난 제주해녀상은 실제 제주 해녀들이 물질을 할 때 입던 짧은 ‘물소중이’ 차림이다. 머리엔 수건과 쉐눈(단 안경)을 하고, 손에는 테왁 망사리와 해산물을 채취할 때 쓰던 까꾸리를 들고 있다. 근대화 이전 제주 해녀들의 실제 그대로다. 해녀상은 30~40대의 젊은 여성의 모습이다. 제주도는 앞서, 다양한 제주해녀상에 통일을 기하기 위해 표준모델을 개발하면서 제주 해녀의 진취성을 강조하기 위해 젊은 모습을 설정했다. 영도 해녀상은 제주도가 표준 모델을 바탕으로 제작한 첫 해녀상이기도 하다.

부산 영도구는 19세기 말 제주 출향해녀의 첫 정착지이면서 제주 해녀가 가장 많이 출항한 지역이다. 때문에 영도해녀문화전시관에는 제주도 최초 출향해녀가 영도에 기착하게 된 배경과 그들의 생활상을 담은 자료가 다수 전시되고 있다. 조동근 제주도 해양수산국장은 “지난 6일 부산시 영도해녀문화전시관에서 제주해녀상 제막식을 갖고 제주해녀 문화 홍보 행사를 진행했다”며 “제주 출향해녀들의 자부심과 애향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제주학연구센터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 상인들은 일본의 해녀(‘아마’)보다 남해안 수온에 더 강한 제주 해녀를 선호했다. 1910년 이전 500명에 불과했던 제주 출향해녀는 1915년 2500명, 1937년 4402명까지 급증했다. 제주 해녀들의 월급은 110원 정도로 소학교 교사 월급(30원)과 비교해 꽤 높은 수준이었다. 이들의 소득은 제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당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던 제주 경제에도 버팀목이 됐다. 현재 부산 영도에는 제주 출신 해녀 100여 명이 물질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