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이·팔 군인이?”… VR 전쟁 체험, 세상 바꿀수 있을까

입력 2019-11-07 10:07 수정 2019-11-07 17:23
북아프리카 튀니지 출신의 카림 벤 켈리파(47)는 프리랜서 종군 사진기자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프간, 이라크 등 폭약 냄새 진동하는 중동 분쟁지역을 20년 가까이 카메라에 담아왔다. 목숨을 걸고 포착한 극적인 순간들은 미국 시사잡지 타임과 일간 뉴욕타임스, 프랑스 일간 르몽드,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 등 세계 유수 매체에 실리고 있다. 지난달 31일 SDF 2019 포럼 참석차 한국을 찾은 그를 서울 동대문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만났다.
칼림 벤 켈리파. 윤성호 기자

그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VR(가상현실) 및 AR(증강현실) 기술을 획기적으로 활용한 저널리즘 프로젝트 ‘적(The Enemy)’을 기획·제작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17년 프랑스 파리에서 최초 상영됐고, 미국 트라이베카영화제 출품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앱으로 제작돼 스마트폰으로도 경험할 수 있다. 누구라도 자신이 지금 있는 장소, 이를테면 한국의 DDP로 서로 총구를 들이대는 분쟁지역 양쪽의 인물들이 쑥 들어와 말하고 있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앱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105개국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르몽드에 실린 카림 벤 켈리파의 사진.

“종군기자로서 최고의 잡지들과 일해 왔어요. 그렇게 15년이 흐른 어느 날, 사진의 영향력에 회의가 일었어요. 내가 찍은 사진이 전쟁이 야기하는 갈등과 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지 못한다면, 평화를 만들어내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문하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분쟁지역에서 대적하고 있는 양쪽 군인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적은 누구인가, 왜 적인가, 적을 죽인 적이 있는가, 평화란 당신에게 무엇인가. 흥미롭게도 서로 총구를 겨누면서도 “평화를 위해서”라는 똑같은 답이 나왔다. ‘적의 초상화’라는 제목의 이 시리즈는 르몽드 등 여러 매체에 실렸다.

2013~2015년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오픈다큐멘터리연구소에 초빙 작가로 체류한 경험은 단순 사진작업을 VR 설치작업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이제 기자인가, 작가인가. “그때도 지금도 나는 기자다. 그런데 이젠 더 이상 젊은 층들이 신문도 잡지도 읽지 않는다. TV도 보지 않는다. 새로운 콘셉트의 뉴스를 원한다. 그래서 앱을 개발한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벨기에인 어머니와 튀니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 문화를 잇는 교량이 되고 싶었죠. 근데 현실에서는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대한 관심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전쟁터에 나가 양쪽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1997년쯤의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벨기에의 유로뉴스라는 TV 채널에 뉴스 직전에 내보내는 2분짜리 ‘노코멘트’라는 섹션이 있었다. 그날 뉴스 가운데 선택한 것으로, 목소리가 전혀 안 나온다. 설명도 없이 사진을 찍은 날짜와 장소만 제공할 뿐이다.

“TV를 보는데 문득 그 사진 프레임 밖에 있는 건 뭘까 궁금해지더라고요. 당장 가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길로 카메라를 사서 유고슬라비아 내전 지역으로 갔지 뭡니까.”

독학으로 사진을 익혔지만 타고난 감각 덕분인지, 유고 내전을 찍은 지 1년여 만에 여러 매체에 사진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는 인물의 머리와 팔 끝부분을 트리밍하거나 몸통 뒤로 감춘 총을 대각선 구도로 잡아내는 등의 방식을 통해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2018년 스위스 월드VR포럼에서 베스트저널리즘상을 받는 등 20차례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