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은 퇴색한 단어인가…국립현대미술관이 50주년에 묻다

입력 2019-11-06 06:00 수정 2019-11-06 06:00
우리에게 광장은 어떤 의미인가. 광화문을 가득 밝힌 촛불 시위로 2017년 정권 교체를 이뤄내며 직접 민주주의를 경험한 뒤 광장은 느꺼운 단어가 됐다. 그러나 광장 정치가 일상화되자 이제 ‘광장 피로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중앙홀에 걸린 대형 걸개그림. 최병수 작가가 시민과 함께 그린 '한열이를 살려내라'(중앙)와 '노동해방도'가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퇴색한 단어가 돼버린 ‘광장’을 국립현대미술관이 키워드로 들고 왔다. 50주년 기념전에서다. 전시 제목은 ‘광장: 미술과 사회’이다. 한국 미술사 100년 위에 격동의 근현대사 100년을 포갠다. 50주년의 무게감 때문에 덕수궁·과천·서울관을 총동원했다. 소장품과 대여 작품 등 300여점이 쏟아졌다.

덕수궁관은 1900∼1950년, 과천관은 1950∼2019년, 서울관은 동시대 미술을 다룬다.

방점이 찍힌 곳은 과천관이다. 전시는 최인훈의 동명 소설에서 제목을 따왔다. 광장(사회), 밀실(개인), 바다(이상향)로 이어지는 분석 구도도 소설에 기댄다. 현대사가 그랬지만 우리의 미술사 역시 그렇게 분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을 사회문화사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시도인 만큼 잡지, 광고, 자동차와 TV, 라디오 등 생활문화까지 전시 요소로 끌어들여 친근감을 높였다.

과천관은 1층 전 층이 사용됐다. 백남준 비디오아트 작품 ‘다다익선’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햇빛이 드는 중앙홀에 대형 걸개그림이 걸려있어 광장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영화 ‘1987’로 밀레니얼 세대에게까지 익숙한 최병수 작가의 ‘한열이를 살려내라’ 그림도 반갑지만, 그가 시민 35명과 함께 그린 ‘노동해방도’는 무려 가로 21m의 상상 초월 크기로 압도한다.

이어 1, 2전시실에서 한국전쟁부터 시작해 1960년대 앵포르멜, 70년대 단색화, 80년대 민중미술, 90년대 팝아트와 포스트모던 미술로 이어지는 연대기 순으로 미술사를 정리한다. 들머리는 총소리에 쓰러지는 자세를 취한 무용수들의 퍼포먼스를 통해 6·25의 아픔을 성찰한 40대 작가 안정주의 영상으로 시작된다. 우리 미술계에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당대 그림이 드문 뼈아픈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기도 한 작품이다.

강요배의 회화 ‘동백꽃’, 임흥순의 영상 ‘승시(징후)’ 등을 통해 한국전쟁의 복선이었던 4·3항쟁을 다룬 작품 코너는 미술사를 현대사 속에 중첩하려는 전시팀의 연구자적 자세를 보여준다. 술사만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배태시킨 사회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미술 외적인 자료를 써서 구성의 밀도를 높였다. 김구림의 ‘피아노 위의 정사’ 같은 실험 미술은 선데이서울에서 다뤘다. 한 시대의 미술과 함께 호흡한 잡지와 경제개발계획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여의도 광장 건축 모형, 가정의 행복을 상징하는 TV와 라디오 수상기, 아파트 문화로 사라진 장독 등이 전시장으로 들어와 맥락을 풍성하게 한다.
과천관에 나온 김소라&김홍석의 '만성 역사 해석 증후군'. 2003년 작, 혼합재료. 기념동상의 각종 부위를 조합해 괴물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역사적인 사건을 작위적으로 해석해 괴물을 만드는 우리 문화 정체성을 비판한다.

이중섭 박수근의 회화, 성두경의 사진 등 전후의 궁핍했던 시기를 보여주는 섹션은 판잣집을 떠올리게 하는 전시공간을 따로 짜서 ‘레트로 감성’을 자극한다. 소극적인 저항으로 자찬 되는 1970년대의 단색화를 밀실의 개념으로 접근한 것도 정확하다.

‘다다익선’의 왼쪽 원형 전시장에는 북한, 디아스포라, 세월호 사건 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전시됐다. 주제의 가지를 지나치게 뻗다 보니 이곳은 구성이 다소 헐겁다.
덕수궁관에 나온 채용신의 '면암 최익현 초상'. 1925년 작 , 비단에 채색.

서울 덕수궁관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다루면서 ‘의로움’에 초점을 맞췄다. 근대기 미술작가를 ‘정의’라는 관점에서 새로 직조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개화기도 위정척사파를 중심으로 자결, 의병, 은거의 맥락에서 역사 속 인물들을 소환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자결했던 민영환의 방에서 자랐다는 대나무를 양기훈의 ‘민충정공 혈죽도’ 판화,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며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의 ‘묵란도’, 여성 의병 조기순의 ‘석란도’, 망국의 한을 시각화하듯 대나무를 뒤집어서 그린 윤용구의 ‘도수죽(倒垂竹)’ 등 매난국죽을 통해 비분강개의 시대적 감정이 이입된다. 을사늑약 체결 후 낙향해 우국지사와 지역민들의 초상화를 그린 채용신의 작품을 여러 점 볼 수 있는 것도 눈의 호사다.
오세창이 1946년에 전서체로 쓴 '정의인도'.

일제강점기에는 오세창 최남선 김찬영 노수현 나혜석 등 문인과 서화가들이 잡지를 창간하고 삽화를 그리는 등 출판 활동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전시의 대미는 오세창이 1946년 광복절에 파격적인 전서체로 쓴 ‘정의인도(正義人道)’이다. 진본 논란 끝에 인쇄본으로 밝혀지긴 했으나 전시가 주려는 의로움의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기엔 충분하다.
서울관에 전시된 요코미코 시즈카의 '타인 23'. 2000년 작, c-프린트.

서울 종로구 삼청로 서울관은 오형근, 송성진, 함양아, 홍승혜, 요코미조 시즈카, 날리니 말라니 등 국내외 12명의 작가를 초청했다. 보수와 진보 진영이 각각 광화문과 서초동을 점유하며 제 목소리만 외쳐대는 ‘폐쇄적 광장’시대에 진정한 광장이 뭔지 묻고 싶다면 서울관 전시를 권한다. “다른 생각을 가진 남과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돌아보게 하는 작품들이 많다. 일본 작가 요코미조 시즈카가 무작위로 “당신이 방안에 있는 모습을 밖에서 창문을 통해 촬영하고 싶다”고 제안해 허락을 받아 찍은 작품 ‘타인’시리즈가 인상적이다. 적당한 거리 두기, 즉 존중이야말로 광장으로 가는 길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덕수궁·서울관 내년 2월 9일까지, 과천관 내년 3월 29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